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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Sep 27. 2019

나는 진지한 내가 좋아졌다

좀 더 나은 내일이 되리란 희망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취업 면접에서 받은 질문이었다.


"재밌는 사람이요."

"왜요?"

"좀... 제가 진지한 편이라서요. 같이 있으면 재미없어하는 친구들도 있는 것 같아요. 유쾌한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요."


도대체 왜 저렇게 답변을 했는지 모르겠다. 탈락한 면접이었다. 나는 꽤 솔직한 사람이었나 보다. 난 정말로, 내가 진지하다는 게 콤플렉스였다.


서른 살부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여전히 나아질 생각이 없는 칙칙한 현실에서,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지낼 수 있는 건 내가 진지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감동적인 책 한 권, 향기 좋은 차 한 잔, 볕이 좋은 날 요가 수업. 나는 별것 없는 일상에서 쉽게 빛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쉽게 빠져들고, 몰입하는 성격 탓에 예민하고 진지한 줄만 알았는데, 그게 오히려 좋아졌다.


서른 살 전까지는 누군가와 부대끼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에 둘러 싸여 있었고, 사회 초년생일 때는 회사 동기들, 선후배들과 항상 함께였다. 회사 생활이 익숙해지고, 주변 사람들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주 52시간이 도입되고, 회식이 없어졌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람들과 거리가 생겼다. 늘 누군가와 함께 일하지만 예전보다 사람 영향을 덜 받게 되었다.


20대까지는 나의 진지함을 '남 생각'하는데 집중했다. 삼십 대가 되고 나니, '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기분이 좋은지, 화가 나는지. 어떤 성향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서른 살 일 년 동안 매일매일 치열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니 '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까, 언제나 나를 완벽하게 아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를 안다는 생각은 안정감을 주었다.


기분이 상할 때, 불쾌한 감정이 들 때, 정확히 왜 그런지 알게 되면 마음을 다스리기가 좀 더 쉬워진다. 기분이 좋아지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생각하고 기록해둔다. 그리고 내가 자주 그 상황에 놓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기분 좋은 일은 좀 더 자주 일어나도록, 기분 나쁜 일은 줄어들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마음을 비우고 흘려보내는 연습을 한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연습을 하고 나니 일상이 전보다 수월해졌다.


'할만하다'라는 자신감이 생기고부터였다. '진지하게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나 덕분에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즈음, 진지한 나를 만나러 왔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다음에 우리도 점심이나 먹자"


옆 팀 후배와 오며 가며 인사하다가 누구나 흔하게 건네는 인사를 했다.


나는 진심 없는 빈말을 싫어한다. 그래서 밥 한번 먹자, 나중에 얼굴 한번 보자,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내가 그 친구에게 점심이나 먹자고 한건, 정말 그녀와 점심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늘 밝고, 부드럽고, 다정다감하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다른 팀 후배에게 들이대듯 뜬금없이 밥을 먹자고 할 순 없어서 빈말처럼 진심을 던진 것이다.


"저 고민 있어요. 대리님, 우리 점심 같이 먹어요!"


그냥 "네 밥 먹어요."가 아니라, 고민? 그렇다면 더더욱 밥 한번 먹어야지. 후배와 나는 그렇게 기약 없던 약속을 정말로 잡았다.


점심시간에는 회사 로비까지 내려가는 데만 10분이 걸린다. 밥 먹으러 가는 길부터가 전쟁이다. 만원 엘리베이터를 4대 보내고, 이리저리 치이고, 끼인 채로 아무 말도 없이 1층에 도착하고 나면, 밥을 먹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정말이지, 점심시간 1시간은 짧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비어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덮밥집 자리 없음, 돈가스집 자리 없음, 라멘집 자리 없음. 그냥 기다리자! 라멘집 입구 의자에 앉아 메뉴를 미리 주문했다. 금세 자리가 나서, 테이블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마자 나온 말이었다.


"대리님이랑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본론부터 훅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배고픈 상태에서. 엘리베이터 전쟁을 치르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저는 열심히 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고, 이상하다고 해요. 저는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진지한 얘기를 할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저번에는 집 가는 길에 저희 과장님한테 물어봤어요. 어떻게 버티시냐고. 과장님도 이직하려고 했대요. 그런데 잘 안됐대요. 다른 데 가도 똑같다고 사람들은 그러더라고요. 그냥 열심히 할 필요 없다고. 대리님은 어떻게 버티세요? 이런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시계를 보니, 벌써 35분. 10분 만에 밥을 먹고 일어나야 늦지 않게 사무실에 돌아갈 수 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 무슨 말을 해야 도움이 될까.


결국, 별로 도움되지 않는 내 얘기를 했다.


"나는 요가를 하고 마음이 정말 좋아졌어. 독서모임을 해봐. 좋은 어른 친구를 사귀는 기분이 들 거야. 혼자 카페에서 책 읽는 것도 좋고. 아! 난 취미생활을 정말 열심히 하거든. 베이킹이랑 브런치 글쓰기 등등! 회사에서 미래를 못 찾은 거지, 나도 결국. 나는 회사원이라는 정체성보다 더 큰 존재라고 위안을 삼아."


아,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그냥 이 친구는 자기 속 얘기를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던 건데, 나는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내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에 상처를 받은 후배한테, 회사에서 미래를 못 찾았다는 말까지 해버렸다.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고마웠다. 진지한 나를 찾아와 줘서. 진지한 나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해 주어서.


지금까지 나는 나의 진지함이 사람들을 어색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유쾌한 척을 했다. 그러고 나면 금세 지쳐버린다. 내가 아닌 모습을 나인 것처럼 보여주는 일은 꽤 힘이 많이 든다.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진지함이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은 모습일 수 있구나.


진지한 나는 퇴근길 내내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이 고마운 친구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독서노트를 뒤적거렸다. 읽었던 책 중에, 그녀에게 선물할 책이 뭐가 있을까.


직장에 첫발을 내딛고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일에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해봤자 실망할 것이 뻔하다는 것을 십중팔구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일에 투사하는 수많은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하는 우리는 씁쓸함에 시달린다.

...

그럼에도 '필요' 이상을 하게 되는 어떤 마음이 있다. 돈으로 돌아오지 않을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마음, 내 몫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떨치는 쪽이 영리한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걸 안다 해도 일에 쏟아서는 안 되는, 그 갈 곳 없는 마음은 어째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에게 남은 활동이라고는 노동뿐인 이 시대에도 우리에겐 유용한 것을 창조하고, 사람들 속에서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이거다! 제현주 작가의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그리고 한권을 더 골랐다. 역시 제현주 작가의 [일하는 마음]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위로하는 책이라면, [일하는 마음]은 이상에 가까운 꿈을 꾸게 하는 책이다. 두 권을 다 읽어야 마음의 균형이 잡힐 것 같았다.


책 취향은 사람마다 섬세하게 달라서, 책 선물은 자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꼭 책 선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로 다 하기 어려울 때. 그럴 때 섣불리 말을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말들이 나오기 쉽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사소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을 때. 책을 선물한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진지하게 군다.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말들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걱정하고, 방법을 고민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나 진지한 내가 좋다. 어쩌면 이런 진지함이 좀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그런 헛된 희망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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