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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Oct 16. 2019

적극적으로 예민해질 것

섬세하게 나를 알아차리는 일

2년 전, 겨울. 자다가 가위에 눌린듯한 고통에 잠이 깼다. 정신은 있는데 오른쪽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버둥거리다가 알았다. '이건 가위가 아니야.' 왼쪽 팔과 다리는 멀쩡했다. 허리 위부터의 오른쪽 몸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특히 등 뒤는 조금만 움직여도 쩌릿쩌릿한 통증이 느껴졌고, 오른쪽 어깨는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새벽 4시. 민폐인 걸 알지만, 방법이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몸이 안 움직여. 와줄 수 있어?" 파주에서 서울까지 아빠와 엄마는 씻지도 못하고, 옷만 챙겨 입고 달려와주었다.


보통 이럴 땐, 바로 응급실에 가거나 아니면 통증의학과, 정형외과 뭐 이런 병원에 가야 하겠지만, 우리는 한의원으로 갔다. 오랫동안 부모님이 믿고 다니던 곳이기도 했고, 나는 직감으로 근육이나 신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회사에서 매일 야근을 했다. 야근도 야근이지만, 직장생활 자체가 고되고, 힘들었고, 그래서 싫었다. 회사에서는 먹는 점심은 거의 소화하지 못했고, 매일 체하다가 가끔 괜찮은 날들이 있는 정도였다. 오후 3시부터는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 두통약과 소화제를 번갈아 먹으며 버텼다.


지금 돌아보면 그 정도로 힘들 게 없는 생활이었는데, 나는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정확히 무엇 때문에 힘든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고통을 적립해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계가 온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게 잘 사는 것 같아요?"


늘 차분하고 따뜻하던 한의원 원장님이, 단호한 얼굴로 물었다. 진맥을 짚을 필요도 없다는 표정으로. 진료실에서 그 말을 듣고는 엉엉 울어 버렸다.


"저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것만 배웠거든요. 뭐가 잘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쉬는지도 몰라요. 놀 줄도 몰라요. 그냥 재미없게 그렇게 30년을 살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바쁘지만 운동도 열심히 하는데 몸은 점점 안 좋아지고, 지금은 뭘 먹어도 체하니까 그냥 먹는 게 두려워요"


"거 봐, 운동도 열심히 하잖아. 숨 쉴 구멍을 하나도 안 만들고 사니까 그렇죠."


"저 취미도 있어요. 집에서 쿠키도 만들고, 책도 읽고요."


선생님은 별 말없이 웃었다.


"그것도 열심히 하죠? 일하는 것처럼? 침 맞고 가요. 지금 오른쪽 몸이 굳은 건, 위랑 간이 부어서 그런 거거든요. 미안한 얘기지만, 내일은 더 부을 거야. 일주일 정도는 내내 아플 거야. 또 아프면 와요."


정말이었다. 그다음 날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출근까지는 했는데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다시 한의원에 왔다. 위와 간이 부으면서 몸을 움츠리게 되고 호흡이 짧아져서 그렇다고 했다.


뭐가 됐든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니던 운동 학원을 그만뒀다. 독서도, 요리도, 베이킹도 일단 멈췄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가만히 누워있다가 씻고 잠을 자고 또 회사를 갔다. 체력도 의욕도 없는 나날들이었다. 누워서 쉬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위와 간의 통증이 재발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괜찮다가 갑자기 찌를듯한 통증이 찾아오기도 했다. 언제 응급실에 갈 지 몰라서, 미리 병원 가방을 챙겨 두기도 했다.


'강도가 약한 스트레칭 정도의 운동을 해보면 어떨까?' 누워있다가 든 생각이었다. 쉰다고 해서 더 나아지도 않고, 스트레칭 정도라면 무리가 안 될 테니까. 파워 요가, 다이어트 요가, 이런 체력소모가 많은 요가 말고 가벼운 요가는 없을까. 회사와 집 사이의, 거의 모든 요가학원을 뒤졌다. 인터넷으로 위치와 시간표, 커리큘럼을 비교해보고 한 곳을 찾아갔다. 커리큘럼에 '테라피'와 '명상'이란 단어가 있었다.


"지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하셨으니, 강도가 약한 테라피 수업부터 들어보세요"


첫 수업으로 소마 요가 수업을 들었다.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서' 몸을 느끼고 자각하는 수업이었다. 한 시간 중 반 이상이 누워서 골반을 위로 아래로 굴리는 게 전부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어려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 최근에 교통사고 당한 적 있어요? 아니면 아주 크게 심리적으로 충격받은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냥 회사 다니고, 별 일은 없었어요. 다들 회사 다니면서 스트레스받잖아요. 저도 딱 그 정도예요."


"그렇군요. 지금 몸 뒤쪽, 그러니까 등 쪽 근육이 아주 딱딱하게 굳어있어요. 위장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2년 가까이 꾸준히 요가를 하고 있다. 요가를 하면서, 아주 조금씩 조금씩 몸이 바뀌었다. 이제는 어려운 동작도 따라 할 수 있고, 두 시간 넘게 수련을 할 수도 있고, 두통과 소화불량, 위염이 사라졌다. 근육을 단련시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상태를 스스로 '자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는 요가원에서는 몸과 마음을 '자각'하는 훈련을 가장 중점적으로 한다. 동작을 아주 천천히 하면서 그 동작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모든 근육과 신경을 느낀다. 숨이 어떻게 쉬어지는지, 어느 지점부터 근육이 긴장되는지, 근육이 이완될 때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그것들을 느끼려면 아주 예민해져야 한다. 몸의 사소한 변화에 민감해져야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오직 나 자신에게 집중한 채로 매일 한 시간씩 온전히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들이 쌓여갔다. 감각에 집중한다는 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있었던 온갖 '딴생각'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워낙 뻣뻣한 탓에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고, 그날 회사에서 들었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딴생각이 올라오면, 애써서 지우려 하지 마세요. 창문 밖에서 사람들 말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냥 들으세요. 억지로 안 들으려 하지 말고요. 알아차려 주면 돼요. 아, 밖에서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구나, 아 배가 고프다. 그때그때 솟아오르듯 떠오르는 생각들을 바라봐 주세요. 대신,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번지게 하지는 마세요. 그냥 바라만 보세요."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내가 이 동작이 안 되는구나, 여기까지는 쉽구나. 이 동작을 하면 팔목이 아프구나. 알아주면 되는 거예요."


요가를 시작하고 1년이 넘도록 계속 자세 잡기가 힘들고,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떨쳐지지 않았다.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선생님의 말이 들려왔다. 깊고 길게 호흡을 했다. 몸과 마음, 외면과 내면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1년이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몸을 '자각'하게 되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섬세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몸을 쓰는 것뿐 아니라 내면의 상태도 민감하게 느끼게 되었다. 생각과 감정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연습은 너울 치는 감정 기복을 안정시켜 주었다. 오히려 예민하게 집중해서 생각과 감정을 파고들수록,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 감정의 실체를 알아야,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습관적으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상사 때문에 화가 났을 경우, 그 감정의 겹들을 풀어헤쳐서 파고드는 것이다. 이 분노의 실체가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는 왜 무시받는 것을 싫어할까? 사회적인 인정 욕구가 높은 사람이라서? 그런데 저런 사람한테 인정받는 게 무슨 소용이지? 존중할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게 기분 나쁠 일인가? 심지어 저 사람은 나를 무시할 의도조차 없는 것 아닐까? 그저 늘 하던 습관대로 말을 할 뿐인 것 아닐까?


스트레스를 안 받게 된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인간이 '진화'시킨 고도의 방어 능력이다. '이건 위험해! 이 사람은 멀리해!' 위험 신호를 보내야 미리 대처하고 피할 수 있다. 다만,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전보다 쉽게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훈련이 되면 점점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적극적으로 내면의 상태에 예민해지면, 자신의 감정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가짜 감정'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그 순간의 분위기가, 그 날의 컨디션이 진짜 감정 겉면에 겹겹이 덮여 있다. 그것들을 들어내야 진짜 감정을 만날 수 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사원증처럼 가지고 있는 '소화불량', '위염'도 나았다. 내 몸이 독을 품고 쌓아, 단단하게 굳기 전에 그 상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는 팔이 마비될 때까지 내 몸을 방치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감고 크게 기지개를 켠다. 내 몸의 상태를 느껴본다. 오늘은 어디가 불편하고, 얼마큼 피곤한지 알아차린다. 피로감이 덜한 날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차도 마신다. 창문을 열어 선선한 바람을 맡기도 한다.


여전히 출근하면 일더미에 파묻힐 거고, 날카로운 말들에 찔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들이, 그 말들이 나에게 어느 정도로 유해한 지, 또 얼마큼 무해한 지 알 수 있다면 대처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예민하게, 아주 집요하게 나는 나를 대할 것이다. 아주 소중하고 작은 것들을 바라볼 때처럼, 오랫동안 세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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