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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Oct 20. 2019

세상을 나에게 맞출 때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일을 시작할 때는, 세상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고 불편하다. 말이 안 되는 지시를 받고도 '못 하겠다'는 말을 못 한다.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만, 이내 묵인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아도 별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 수가 없으니까.


유일한 희망은 언젠가, 나에게 세상을 맞추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에게 그 시기가 자연스럽게 온다는 속 편한 말은 할 수 없다.




26살 여름이었다. 첫 회사를 다닌 지 꼭 1년 반이 된 때였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회사 안에서의 업무 형태, 관계 맺는 방식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할지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사업이어도 좋고, 인사팀 교육 담당자라는 경력을 살려서 교육 쪽 일도 좋다. 아니다, 차 마시는 일을 좋아하니까, 차를 배워볼까.


"야, 내가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기다. 하하하하하"


새로운 계획을 얘기할 때마다 친한 친구들은 농담처럼 받아넘겼다. 공유 오피스 사업을 할 거야! 카페를 할 거야! 티 소믈리에가 될 거야! 행복 치료 전문가가 될 거야! 관심 있었던 모든 분야에 대해 검색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만 2년을 정확하게 채우고 퇴사를 했다. 여전히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아직 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겁도 많고, 조심성도 많고,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사람인데 의외로 큰 결정 앞에서는 대담하다.


부모님에게도,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의 남자 친구에게도 예고편 없이 퇴사 소식을 알렸다. 인사담당자와 퇴사 면담을 하고 난 후였다. 마음의 결단은 내렸고, 남들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나중에 알렸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다. 6개월의 백수 시절 내내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그러게 좋은 직장 다니면서 결혼 자금이나 모으지 뭐하러 뛰쳐나왔어."


부모는 자식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기도 하지만,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1차 시도에 실패했다. 퇴사하고 학원 강사 면접도 봤고, 교육 관련 스타트업에도 서류를 내 봤고, 서점 직원 면접도 봤다. 각종 이런저런 새로운 일들을 기웃거렸다. 사람이 급한 분야들이었기에, 매번 당장 일을 시작하자는 긍정적인 반응이 왔다. 문제는 이상하게도, 같이 일하자는 좋은 답을 듣고도, 몸이 앞으로 움직이질 않았다.


아직은 아니야. 이건 아닌 것 같아. 나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회사가 안 맞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래서 그다음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결국, 다시 대기업 공채를 봤다. 어렵게 모은 돈이 너무나도 빠르고 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는 게 두려웠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애매한 경력을 갖고 있었기에,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왜 퇴사했냐는 면접 질문에도 여러 버전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었다.


첫 회사와는 달리 나보다 어린 동기들과 함께, 다시 이 지긋지긋한 세계로 돌아왔다. 변한 것은 있었다. '내 이야기를 만들 거야.' 입사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회사에서 꿈을 꾸고, 경력을 확장해나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존중한다. 단지, 나는 회사에서는 시들어가는 사람인 것이다.


"눈을 반짝이며, 빛날 수 있는 곳? 현실에서 그런 곳은 없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도,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는다. 결국 또 실패할 지라도, 믿지 않기로 했다. 비록 지금은 세상에 나를 맞추고 있지만, 언제가 세상을 나에게 맞추는 때가 올 거야.


은희경 작가는 한 강연에서 말했다.

"글을 잘 쓴다고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할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남의 일을 하고,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지시대로 행동할 지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다른 일로 전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지겨운 이 생활로부터 먼저 탈출한 사람들, 먼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새로운 힘이 생기기도 하고, 반대로 좌절하기도 한다. 어쩌면 저들은 처음부터 나와 달랐을지 몰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아니면 어쩌지. 직장인으로 살다가 인생이 끝나면 어쩌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에, 나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나만의 일을 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이야기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또를 사지 않고, 복권 당첨을 바랄 수 없듯이. 우리가 지금 당장 우리의 일을 할 수 없을지라도, 이야기를 쌓아야 한다. 내 안의 물이 가득 차서 찰랑찰랑- 흘러넘칠 때까지.


첫 책을 낸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떻게 첫 책을 쓰게 되셨어요?' 이 질문에 많은 작가들이 이렇게 답한다.


"어느 시기를 지나면서, 제 안에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쌓이게 되었어요. 저는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야만 했고, 그래서 글로 썼어요."


그럼 무엇을 어떻게 쌓아야 할까. 무슨 그림을 그려두어야 할까.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도 있고, 그다지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다. 지금 당장 좋아하는 게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개 '좋아하는 것'은 우연한 기회로 만난다. 마음속에 분명한 '이것!' 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 보다가, 오! 재밌네? 계속하고 싶다.라는 것을 발견한다. 세상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알 필요는 없지만, 경험해 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미술학원에 1년 동안 다닌 적이 있다. 직장인들을 위한 취미 미술학원이었다. 처음 6개월은 매주 토요일만 기다릴 만큼 그림 그리는 게 재밌었다. 그러다 집에서 쿠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쿠키를 만들면서, 그림보다 베이킹이 더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료를 계량하고, 반죽을 만들고, 구워내는 일에 몰입했다.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시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바로 그만두기는 민망해서, 6개월을 더 다녔다. 그리고는 그만뒀다. 나는 고효율 지향적인 사람이어서,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창작물이 실용적인 가치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추어 홈베이커가 만든 쿠키는 먹을 수라도 있지만, 아마추어 그림은? 훅 빨려 들 듯 베이킹에 빠져들었고, 3년 가까이 베이킹을 하고 있다.


싫증을 잘 내고 변덕이 많아서, 한 분야에 정착하지 못하면 어쩌지? 계속 이렇게 새로운 분야만 찾아다니면 어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 베이킹이라면 자신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맛을 표현할 수 있고, 원하는 식감의 쿠키를 구워낼 수 있다.


아주 세심하게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베이킹, 명상, 차를 배우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고등학생 때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돈만 있으면 평생, 요가하고 책 읽고, 과자 만들고, 차만 마셨으면 좋겠다."


여전히 그것들만으로 일상을 채울 돈은 없다. 그러나 조금씩 내 안에 이야기들이 채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큼 더 채워야 나의 '때'가 올지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친구들은 말한다.


"이제 카페를 열어보면 어때?"

"요가를 좀 더 배워서 명상 요가 강사가 되어봐."


"글쎄? 내 안에 꿈틀꿈틀 뭔가 새로운 계획이 만들어지고 있긴 한데,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좀 더 내 이야기가 채워지면, 나도 나만의 일을 할 수 있겠지. 세상을 나에게 맞추는 그때가 반드시 올 거야.

무모한 꿈을 꽤나 진지하게 꾸는 것. 그게 나니까."


비긴 어게인3에서 박정현이 부른 MyWay를 듣고 울컥, I did it my way 이 대목을 한참이나 돌려보았다.




사진 출처 | JTBC 비긴 어게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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