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소중함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
"대리님 어쩜 이래요."
"네?"
"양식 보내준 거 봤어요. 딱 필요한 내용만 들어가 있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보기 좋네. 얼마나 고민하면서 만들었을지 느껴져요. 고생했어요."
영업 부문 전체 대상으로 행사 상품 취합 양식을 보냈었다. 꽤 오래 고민하고, 넣고 빼고를 반복하면서 새롭게 만든 양식이었다. 보통 MD들은 기한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바빠서 상품 제안 양식을 제대로 검토할 시간이 없다. 그 와중에 이렇게 칭찬까지 하는 사람이라니, 그녀는 야무지게 일하기로 유명한 과장이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의 행사란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획과 프로모션, 상품 세팅의 쳇바퀴이다. 매번 행사별로 다른 컨셉에 맞추어 다른 상품을 준비하고 마케팅팀에 전달하는 MD들은 사실상 거의 없다. 빡빡한 영업 환경을 알기에, 불평보다는 빠른 수정과 피드백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한을 넘긴 적은 간간히 있었지만, 매번 미리 양해를 구했고, 결과물은 컨셉과 기획의도에 딱 맞았다.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은, 디테일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소한 차이를 인정하려면 스스로 그 사소함에 예민한 사람이어야 한다. 작은 차이에 민감한 사람이 만드는 결과물은 다르다.
꼭 일을 잘해서만이 아니다.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은 정말 사랑스럽다. 칭찬과 감탄은 다르다. 칭찬이 언어의 표현이라면 감탄의 마음의 표현이다. 칭찬을 남발하는 사람은 좀처럼 신뢰가 잘 가지 않는다. 누구한테나 다 하는 기계적인 칭찬은 반갑지 않다. 그런 칭찬을 받을 바에야 침묵이 낫다. 감탄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서로의 시도와 성취들에 '진짜 응원과 애정'을 보내기 때문이다. 아무리 별것 아니어 보이는 시도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얼마나 준비했고, 망설였고, 마음속으로 번복했고, 조급했는지.
서로의 시도와 성취들에 (칭찬이 아니라) 감탄하는 것, 그 감탄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서로를 향한 최고의 임파워먼트라는 점이다. 기꺼이 박수 보내는 청중이 되어주는 것, 대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것, 그러다 보면 대단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축복하는 것.
- 일하는 마음, 제현주
내가 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구절 때문이다. 대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것. 대단하기 위한 일들은 대개 남의 시선 속에서 평가된다. 소중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영역에서 성공하는 것 또한 어렵고 힘들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대단하기 위한 일들을 하다가 실패하면, 사람들은 시도는 좋았지만 애초에 달성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위로한다. 소중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을 하다가 실패하면, 시도 자체부터 비난받기 쉽다. 그 시도를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다. 편견 없이, 질투 없이. 누군가의 시도와 성취를 마주하고, 자기 자신과의 비교 끝에 무용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탄할 줄 아는 사람에게 매번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대단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아직 내공이 덜 쌓여서, 순간의 실수로 잘못 판단해서 잠시 주춤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는 것, 용기를 내어 보는 것, 잠시 숨을 고르고 쉬는 것.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알아주려면, 내 생황이 좋아야 한다. 내가 지금 스스로 정체되어 있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란 어렵다.
그러니까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은, 지금 나름 좋은 상황에 놓인 사람인 것이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정도의 여유가 있는 상태이다. 절실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비롯된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많은 일들을 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가까이하기에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인생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 수많은 조연의 하나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매 순간 그럴 수는 없고, 인생의 드라마가 내 것 하나뿐일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의 주연은 '나'인 동시에 상대의 인생에서의 주연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그저 '와- 정말 멋있다. 대단해! 고생했어' 정도의 감탄이면 될 일에 이렇게 복잡한 의미 부여를 해야 하나 싶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을 떠올리고 그를 알아가는 일만큼 뿌듯한 일이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 무용한 건 아닐까 싶은 순간들이 많아진다. 우정이 무슨 소용이야, 동료애가 존재하긴 할까, 가족이라고 다를까? 그러나 사랑이 무용하다고 외칠수록 더욱더 사랑받고 싶어 진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 무용하건 말건 무슨 상관일까.
회사생활을 오래 할수록 인류애를 상실한다고들 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서, 마지막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할수록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든다. 김하나 작가가 스스로를 '사랑교 신자'라고 하던데, 나도 그렇다.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사랑을 필요로 한다. 나는 대놓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다. 감탄할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이고 싶다. 그들 사이에서 서로의 소소한 시도와 성취에 감탄을 주고받으며, 박수와 응원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