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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l 25. 2019

마음먹고 제대로 호구가 되어보니

회사에서 호구 실험을 해보다

두 번째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절대 호구가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어릴 때부터 싫은 소리를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밀쳐내지도 못한 상처들을 낑낑대며 끌어안고 버둥거렸다. 내가 첫 회사를 떠나기로 다짐한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 그 상처를 어쩌지 못했고, 그 상태로 그들과 함께할 수는 없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이곳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굳이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기로 다짐했다. 여기서의 태도는 철저한 외면이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들,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 꼭 있어야 할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했다. 동기 모임도, 팀원들과의 티타임도, 다른 팀 직원들의 좋은 평판도 필요 없었다. 남의 시선과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싶었다. 그동안 나를 상처로 밀어 넣었던 것은 나의 기준이 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맞다고 판단되면 하고, 아니라면 외면했다. 내가 해야 하는 업무들, 맡아야 하는 책임들 앞에서는 피하지 않았다. 나의 중심을 건강하게 세우고 지켜나가고 싶었다. 나 스스로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니까 어쩔 수 없는 일들에는 침묵하거나, 알 수 없는 미소로 일관했다.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은 기꺼이 빠져나갔다.


마음이 없는 마음


어느 회사원이 자신의 상태를 '마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을 봤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직장에서의 모습이었다. 일할 때 최대한 영혼은 담고, 마음은 비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첫 회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2년을 보냈고, 두 번째 회사에서 마음이 없는 채로 4년을 보냈다. 이렇게 계속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처 받지 않았고, 상처를 주지도 않은 채로, 그럭저럭 업무를 해나갔다. 적어도 '왜 일을 그렇게 하느냐'는 소리는 듣지 않았고, 인사평가도 중간 정도는 갔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호구가 되면 안 되나?


지금까지 난 호구였던 순간에도 호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매 순간 아등바등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는 그래도 호구가 되거나, 외면하거나, 외면당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마음먹고 제대로 호구가 되어보면 어떨까?


내게 이런 용감한 실험정신이 생긴 것은 아마도 마음이 안정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구쯤 되면 어때, 나는 든든한 남편도 생겼고, 좋은 친구들도 있고, 모아놓은 돈도 있고, 이제 경력도 있으니까. 그깟 호구쯤 되면 이직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해보거나 그러면 되지 뭐!


내게 이런 배짱이 있었던가. 아니면 없던 배짱이 좀 살만해지니 생긴 건가. 어쨌든 나는 마음먹고 제대로 호구가 되어 보기로 했다. 대신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호구가 될 것. 나에게도, 남에게도. 남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호의를 베풀 것.


후배가 한 실수도 이해하고, 내가 한 실수도 이해할 것.

다른 팀의 요청이 버거워도 가능하면 들어주되, 나도 필요한 업무는 선을 지키며 최대한 요청할 것.

팀원의 잦은 휴가로 인한 업무 백업을 도와주고, 나도 휴가를 많이 쓸 것.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말고, 나도 이용당하지 말 것.


그러니까, 나는 모두에게 호구가 되어 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실험의 결과가 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얄미운 후배한테 이용당할 것이고, 선배들은 내 공을 가로채갈 것이고, 팀장은 나의 고생과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우선 실험을 계속했다.


# 실험 상황 1.


기획파트의 대리님이 한껏 흥분해서 내 자리에 왔다.


"그.. 그.. 9월에 하는 행사 계획안 나왔어요?"

"9월 계획안은 8월 초에 작성할 예정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아무것도 하신 게 없다는 거죠?"


음... 이런 순간들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이다. 자,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호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뇌를 풀가동시키며 머리를 굴렸다.


"대리님,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어느 분 요청 사항인지,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알려주시면 최대한 필요한 부분만이라도 작성해서 보내드려 볼게요."


'어떻게 도와드리면 도움이 될까요?'라는 말이 가진 위력을 이때 알았다. 그 말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다. 온몸을 바르르 떨며 흥분한 사람은 화난 것이 아니라, 불안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받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맡았을 때 그런 반응이 나온다. 그때, 나에게 여유가 있다면 도와주면 된다.


# 실험 상황 2.


팀 특성상, 6개월에 한 번씩 신입사원이 들어온다. 5년 차인 나에게 꽤 많은 후배들이 생겼다. 나는 실수에 절대 화를 내지 않고, 수습해줘 보기로 했다. 내 실수 앞에서도 나는 당당하다.


그럴 수 있지 뭐! 사람인데 어떻게 숫자 실수를 안 해, 어떻게 매번 기한을 지켜, 어떻게 모든 걸 기억해? 물론, 언제나 실수하지 않기 위해, 기한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업무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들에 매몰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좀 더 효율적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고, 꼼꼼함을 무기로 정체되고 싶지는 않다.


별로인 사람에 대해 갖는 태도는 '능력이 없거나, 잘해볼 마음이 없거나'이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인데, 맞고 안 맞고까지 생각할 것도 없다. 그냥 능력이 없거나 마음이 없는 것이다. 타인의 능력이나 마음을 내가 바꿀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흘려보낸 후배도 있다. 그러나, 능력이 없거나 마음이 없는 후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도와줬듯이, 지금은 그들이 나를 오히려 도와준다. 바빠서 정신없을 때는 내 일을 말하기도 전에 먼저 처리해 주기도 하고, 회의에서 내 말에 힘을 실어주며 도와주기도 한다.


다른 실험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나는 매번 위험을 무릅쓰고 호구가 되어봤고, 그 결과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무서웠던 것은, 남에게 호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호구가 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미웠던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나 스스로가 미웠던 적이 많다. 돌아서서, '아 그때 이 말을 했어야 해!' 속으로만 시원한 주먹을 날려댔다.


이제 실험을 마무리하려 한다. '모두의 호구가 되는 것'. 이것을 앞으로 나의 여러 원칙 중 하나로 삼아도 되겠다. 실험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나는 호구인 시절도 있었고, 호구가 되지 않으려 버둥거리던 시절도 있었고, 기꺼이 호구가 되어봄으로써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남에게 호구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신에게는 호구인 사람들이었다.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해서, 스스로를 이해해주지 못해서, 스스로를 보듬어 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다.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들을 무서워할 일이 아니었다.


아, 물론 그들을 가까이하거나 보듬어주고 싶진 않다. 나의 평온함도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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