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함을 잃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우리 팀은 점심을 자유롭게 먹는다. 팀원이 10명 정도 되는데, 각자 그날그날 점심 약속을 잡는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개인적인 성향의 팀원들이 유독 많기도 하고, 오히려 팀원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오전에 정신없이 일하다, 옆자리 후배와 한동안 점심을 같이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먹자고 했다.
한참을 신나게 회사욕을 하다가, 후배가 물었다.
"선배는 일은 잘하는데 못된 팀장이랑, 일은 못하는데 인성은 괜찮은 팀장 중에 누가 나아요?"
"옛날에는 못되도 좋으니까 일이나 좀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효율적으로 상황 판단하고, 결정 내려주는 게 필요한 자리니까.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그래요?"
"어차피 팀장이란 자리는 실무를 잘 모르고, 자세히 알기도 쉽지 않잖아. 그러니까, 팀원들 잘 케어하고 끌고 가는 사람이 낫겠구나 싶어. 일은 결국 우리가 하는 거고, 결정 잘 못 내리고 갈팡질팡 하는 리더라도, 능력 있는 팀원들로 잘 꾸리고, 팀원들 의견 잘 들어주는 사람이면 아주 잘못될 일은 없겠지."
매년 리더십 교육을 받는데도 팀장들은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리더십은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라 타고나야 하는 걸까.
"저도 그렇거든요. 리더에게 필요한 건 여유라고 생각해요. 믿고 맡길 줄 알고, 좀 기다릴 줄 아는 거요."
순간, 나는 그런 선배였나 돌아보았다. 혹시 이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에게 테스트당한 건 아니겠지.
회사 생활을 하면, 스스로 원칙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사회생활이란 게 타인에게 인정받고, 이해받는 과정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지만, 남들의 시선 속에 갇히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당장 한 치 앞만 보면서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달리는 팀장들은 원칙을 세우는 과정을 소홀히 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의 원칙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더 나은 일터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나와 함께 일하는 후배들이 나로 인해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야 상사 욕을 마음 편히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을 위해, 우아함을 잃지 말 것.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의 동료들을 위해서 나는 우아함을 잃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회사생활이란 게, 우아함을 챙기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다. 다른 팀에서 예의 없이 던져대는 일들을 막아내야 하고, 팀장이 불안감에 집착하는 일들을 적당히 생색낼 수 있게 처리해주어야 한다. 온갖 황당한 말들이 오가는 회의에서 잔뜩 일을 받아와,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후배들과 나누어하려고 하면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제가? 이걸요? 오늘요?' 입을 가만히 앙다물고 속으로 말한다. '그게... 그나마 정리를 한 거라고...'
내가 우아함을 잃는다고, 품위를 포기한다고 달라질 것 없는 이 혼란의 현장에서 나의 미션은 명확하다.
우아함을 잃지 말 것.
바들바들 떨며 참고 삭히고 넘기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자주 쓰는 기술 중의 하나는 유체이탈을 하듯이 잠시 이 상황에서 빠져나와보는 것이다.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지금 이 상황은 뭘까.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생각을 10% 정도만 정량적,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말의 해상도와 생각의 해상도가 달라서*, 우리가 하는 생각의 90%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상처와 갈등은 주로 말이 원인인데, 말이라는 게 별로 정확하지 않다 보니, 우리는 서로 말을 나누며 일을 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생각을 주고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을 가지고 화를 내고, 상대를 몰아붙이고,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품위를 지킨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품위를 잃는다고 해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오히려 정신 차리고 돌아보면, 민망하고 미안한 일이 많았다.
처음 팀에 후배가 들어왔을 때, 좋은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후배의 실수가 나의 결점으로 연결되는 것이 싫었다. 욕먹는 게 가장 두려웠던 시절이다. 후배가 업무를 할 때, 혹여 빼먹은 것은 없는지, 실수한 것은 없는지 몰래 뒤에서 체크했다. 그러다 실수를 발견하면,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그러나 꼬박꼬박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그 시절 나는, 그에게 예의를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미저리도 그런 미저리가 없었다. 누군가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기분만큼 싫은 게 또 있을까. 불편하게 꾸역꾸역 같이 일하던 우리는, 결국 업무를 분리하고 각자 다른 파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동료였을까 생각해보면 창피해진다. 예민하고,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겠지. 왜 나는 그의 실수를 감싸주고, 기다려주지 못했을까. 나라고 다를 것 없는 고만고만한 상황이었으면서. 지금이면 욕 한번 먹고, 다른 팀 사람들에게 커피 한잔 건네며 가볍게 사과하고 넘길 수 있는 일들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할 만한 가치는 없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다를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니,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나의 원칙을 세울 만큼의 내공도,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아함을 잃지 말자'라는 원칙을 섣불리 세웠다면, 혼자 시름시름 앓다가 폭발하거나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의 시간이 쌓이고, 회사 돌아가는 사정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욕먹는 것, 가볍게 사과하는 것, 자잘한 일을 좀 더 하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다 보면 결국 사람 때문에 고통받지만, 또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일이라는 건 같이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매일매일 빠짐없이 '욱!'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문을 외운다.
나를 별로인 사람으로 만들지 말자.
나에게는 우아함을 잃지 않을 의무가 있다.
* 생각의 해상도와 언어의 해상도가 다르다는 개념은 김대식 교수님의 강연을 엮은 책,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를 보고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