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AI 시대에 왜 번역 공부 햐나고요?

새로운 시대, 최고의 경쟁력은 비효율

by 단단


이 글은 뉴스레터 <함께하는 독학클럽> 6월 25일 콘텐츠입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퇴사하고 번역 공부를 한다고 주변에 알리니까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AI 때문에 번역가라는 직업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번역 공부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사실 저는 보기보다 직관형 행동파거든요.

딱 떨어지는 답이 아니라 느낌에 따라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해요.


퇴사할 때도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갑자기

'오늘이다' 생각이 들어서 그날 바로 퇴사를 결정했고요.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었지만 뭔가 느낌이 왔어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번역가로서 인간이 설 자리는 여전히 있을거라는 막연한 믿음이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설명할 만큼 논리적인 근거가 없어서 1년 동안 일단 번역 수업을 열심히 들었죠.


서서히 실력이 올라가고, 번역이라는 세계와 가까워지면서, 흐릿했던 저의 직감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어요. 지금쯤 한 번, AI시대와 번역에 대한 제 이야기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레터를 쓰게 되었습니다.


4_5_이미지-제작-001.png




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요...!


AI가 줄거리를 요약해주는 시대에도 누군가는 10시간짜리 드라마를 한편 한편 정주행하죠. 왜냐면?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으니까요! 회사 밖에서 나만의 일을 찾겠다고 나섰을 때, 저는 '읽고 쓰는 일'로 먹고 살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번역은 대표적으로 읽고 쓰는 일이잖아요. 자연스럽게 큰 고민 없이 번역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번역 공부를 하면 영어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죠. 영상 시대라지만 여전히 정보의 70% 이상은 텍스트이고, 세상 지식의 절반은 영어로 쓰여있어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기계 도움 없이 영어 텍스트를 바로 술술 읽을 수 있는 건 여전히 경쟁력이 될 거라고 믿었죠.


관심있는 원서를 찾아서 바로 보고, 영어로 된 유튜브를 편하게 보는 것, 영어를 공부할수록 이게 되니까 너무 재미있고 신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찾은 진짜 이유는 이게 아닙니다. 정말 마지막 단계까지 AI가 발전한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 번역가가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52584_2863811_1750748868253829543.jpeg




그래서 이거

사람이 한 거야?


결국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그래서 이거 사람이 한 거야?'라고 물을 겁니다.


얼마 전, SNS에서 <성심당 케이크가 우리를 위로하는 이유>라는 콘텐츠를 보고 크게 공감했어요. 서울 사람들이 왕복 KTX 비용 5만원과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왜 대전에 케이크를 사러 가는지 분석한 글이었어요.


어떻게든 원가를 절감하려는 프랜차이즈 케이크와 달리 성심당 케이크는 '굳이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엄청난 양의 과일을 넣어주잖아요. 재료를 최대한 아낀 프랜차이즈 케이크는 마치 '너는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이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죠. 띠지를 벗기면 앙상한 케이크 시트가 드러나는 케이크를 먹으며, 자존감이 미세하게 훼손되는 감각이랄까요. 성심당 케이크 속에 의아할만큼 가득찬 과일은 바로 그 훼손된 자존감과 인간성을 위로한다는 게 포스팅 내용이었어요.


성심당 케이크는 아직 못 먹어봤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친언니 생일 때, <고마워서그래>라는 그래놀라 브랜드에서 그래놀라 세트를 구매해 보냈더니, 며칠 후 언니에게 카톡이 왔더라고요.


"사장님이 이렇게 손편지를 써주셨더라. 재미있게 읽었던 책 문구도 있어서 반가웠어. 정성이 느껴져서 더 맛있게 먹었어. 고마워!"


52584_2863811_1750744123469106754.jpeg


아무런 언급이 없었지만, 주문한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이 다른 것을 보고, 너무나도 특이한 이름인 제갈명과 제갈O을 보고, 가족에게 보내는 선물인 걸 눈치챈 사장님이 이렇게 손글씨로 편지를 써서 전해주셨던 거예요..!


언니와 저는 이날 이후로 고마워서그래의 팬이 되었답니다. 여기가 최저가여서가 아니라, 총알배송을 해줘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쏟아준 정성이 고마워서요.




나는 효율적인 대우를 받을만큼

하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이 두 사례에서 저는 새로운 시대의 경쟁력을 발견했어요. 바로 '비효율'입니다. 기계가 모든 것을 해주더라도, 심지어 더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해주더라도, 인간은 기어이 인간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사례가 하나 더 있어요. 얼마 전 만난 지인이 '파트너사가 챗GPT로 쓴 보고서를 줬다'고 화를 내더라고요. 처음에는 '결과물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니야? 챗GPT로 쓴 것 자체를 문제 삼지 말고 내용을 보고 평가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곧 깨달았어요. 지인은 자신을 '챗GPT로 쓴 보고서를 줘도 될 만한 상대'로 취급한 게 화가 났던 거예요.


요즘 SNS를 보면 반 이상이 챗GPT로 쓴 글이더라고요. 챗GPT가 자주 쓰는 이모지와 특수 기호에서 딱 티가 났어요. 저도 그렇게 자주 썼으니까요. 그런 글들은 이상하게도, 잘 썼든 못 썼든 상관없이 안보고 넘기게 되더라고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크리에이터 친구들도 하나같이 '엇! 나도 그래!'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사람이 쓴 티를 내려고 챗GPT가 잘 정리해준 글을 다시 살짝 부자연스럽게 고친다고 덧붙였어요. 오타도 슬쩍 내고요. 놀랍게도... 저도 그렇거든요! 챗GPT랑 신나게 글을 쓴 후에는 그걸 그대로 올리지 않고 한 군데라도 고칩니다. 저처럼 다른 사람들도 내용을 읽지도 않고 넘길까봐요.




상품이 아니라

삶을 파는 시대


다시 번역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저는 사실 10년 정도는 인간 번역가가 안전할 거라고 믿어요. 특히 제가 공부하는 '출판 번역'은 책 한권 분량의 텍스트를 종횡무진하며 문체와 맥락을 고려해서 표현을 고르고 다듬는 일이라 아주 큰 데이터 처리능력이 필요하거든요. 기술적으로 가능은 하겠지만 데이터 처리 비용이 비싸서, 가까운 미래까지는 인간이 더 경제적일 거예요.


물론 시간 문제겠죠.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마지막'은 인간이 다듬게 될 거예요. AI가 1차 번역을 하면 인간이 2차로 감수를 하는 형태겠죠. 일의 총량은 어쩔 수 없이 줄어들 겁니다. 그때까지 실력을 키워서 그저그런 번역가가 아닌 감수 의뢰를 받을 만큼 탁월한 번역가로 성장하는 수밖에 없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제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했느냐만큼 누가 번역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얼마큼의 시간을 들여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서 번역했느냐, 그걸 볼 거예요. 물론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었다는 전제로요.


이제는 양질의 상품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질'은 금방 따라잡히거든요. 비슷비슷하게 괜찮은 상품 중에서 내가 만든 상품을 사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줘야죠.


사람들은 제가 쓴 글과 번역물 자체가 아니라 저의 '삶'을 보고 구매를 결정할 겁니다. 이제 상품이 아니라 '삶'을 파는 시대니까요.



무엇을 파느냐 (X)

누가 파느냐 (O)



간혹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펼쳐보다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 글이나 내 글이나 비슷비슷한데

왜 저 사람 글만 잘 팔릴까?'


당연하죠! 저 사람의 삶과 내 삶이 다르니까요. 유명한 사람들의 글을 보면서 역시 유명해지고 봐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애초에 그들의 삶이 매력적이었기에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거죠.


저는 AI 시대에 어떤 직업이 뜬다거나 어떤 직업이 사라진다는 말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무슨 직업이든 상관없이 '효율적으로'하려고 들면 도태될 거고, '비효율적으로' 진심을 담아 정성껏 하려고 하면 살아남을 거예요.




내 꿈은

비효율적인 번역가


번역도 결국 글쓰기입니다. 글은 독자와 호흡하는 매개체죠. 번역이란, 저자의 원문을 정확하게 옮기는 동시에, 이 책을 읽을 독자를 떠올리며 그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언어를 고르고 매만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쓰는 일'은 인간이 나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번역 공부를 시작한 초반에는 챗GPT와 모든 작업을 같이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실력이 조금씩 쌓일수록 일단 혼자서 1차 번역을 하고, 그다음 챗GPT에게 시켜서 각자의 결과물을 대조하면서 일부만 수정합니다. 처음부터 챗GPT랑 같이 하거나, 결과물을 맡겨버리면 '나조차 읽기 싫은, 챗GPT가 쓴 것 같은 번역문'이 나오더라고요.


번역가로서, 작가로서, 크리에이터로서 저는 계속해서 아주 비효율적인 길을 걸어볼 작정입니다. 당장 돈이 안 되는 일을 골라서 하고, 이걸 대체 왜 하냐는 질문을 받는 일을 할 거예요. 왜냐고요?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고 나로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돕는 글>을 쓰는 것이거든요. 이건 효율적인 접근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래서 전 앞으로도 계속 최대한 비효율적으로 글을 쓰고,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워크숍을 진행할 거예요. 아주 천천히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삶으로 보여줄 겁니다. 이건 AI가 못 하는, 아니 굳이 안 하는 영역이니까요.



이 글은 뉴스레터 <함께하는 독학클럽> 6월 25일 콘텐츠입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작가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알 수 있는 질문 세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