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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y 04. 2019

봄의 소울푸드, 냉이

3월, 냉이 된장국과 스콘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이 이제는 밝다. 슬슬 어둑어둑해지려는 게 아니라, 낮의 온기와 반짝이는 햇볕이 떠나기 전 마지막 임무를 다하려는 듯, 모든 공기를 타고 빛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초록이 이렇게 다양했던가, 오후가 이렇게 반짝였던가 내가 알던 그 길 위 같은 공간이 맞나?"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반짝거리는 4월의 저녁에 한참을 멈추어 섰고,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냉이로 저녁밥을 해 먹기로 했다. 요즘 며칠째 소화가 안 되고 더부룩하다. 냉이로 된장죽을 끓여서 따뜻하게 먹어야지.


이번 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운동을 꾸준히 해왔지만, 몸이 쉽게 지쳤다. 마음이 지쳐서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몸이 지쳐서 마음이 지치기도 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허기가 훅- 밀려왔고, 최대한 빨리 허한 몸과 마음을 채우려면 역시 탄수화물만 한 게 없었다. 주로 빵이나 케이크, 파스타를 먹었고, 그게 아마도 탈이 난 것 같다.


주말에 동네 마트에서 봄냉이를 본 순간, 냉이 된장죽을 먹으면 내 위장이 나을 것만 같았다. 초록색 채소는 생긴 모습부터 몸에 좋을 것처럼 생겼다. 특히 냉이나 미나리, 쑥처럼 특유의 향이 나는 것들은 더 그렇다. 약초에서 나는 향을 맡듯이 냉이의 향을 킁킁 거리며 맡았다. "이게 봄냉이의 냄새란 말이지."


냉이 된장죽


냉이는 손질이 어렵지는 않지만, 은근히 손이 간다. 우선 물에 담가 둔 후 흔들어서 뿌리에 묻은 흙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물에 헹구어 주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뿌리 사이사이에 흙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 흙들을 모조리 없앨 수는 없고, 뿌리가 시작되는 지점의 검은 부위만 칼로 긁어준다. 퇴근하고 나면 채소 손질하는 게 정말 고역이다. 당장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고 싶은데, 채소 하나하나 다듬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직장인 채소 생활자로서 가장 바람직한 습관은 미리 준비해 두는 것. 나는 전날 저녁에 밥을 다 먹고 다음날 먹을 채소를 손질해둔다. 어릴 때 엄마가 텔레비전 앞에서 콩나물을 다듬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나 매번 이렇게 효율적으로 집안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채소를 다듬은 후 데쳐서 얼려둔다. 급할 때 정말 편하다.


채소 생활의 장점은 밑준비만 되어 있으면 그다음부터 요리가 정말 간단하다는 것이다. 손질한 채소를 된장 푼 물에 넣고 끓이면 된장국이 되고, 데친 채소를 양념과 버무리면 나물이 된다. 데친 채소를 잘게 잘라서 빵이나 과자에 넣어도 좋다. 향이 좋은 채소들을 페스토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페스토는 밥을 다 먹고 크래커나 빵 위에 얹어서 차랑 마시면 정말! 맛있다.


채소 생활을 하기 전에는 채소를 어떻게 손질하고 보관해야 할지 몰라서 냉동식품을 자주 이용했다. 채소가 정말 필요할 때는 샐러드 채소를 사서 드레싱을 뿌려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끔 정말 엄마가 해주던 채소 요리가 먹고 싶어 질 때가 있다. 로메인, 양상추 이런 거 말고 시금치, 고사리 이런 것들이 무척이나 그리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역시나 나이 들어서 입맛이 변한 건가 싶기도 하다.


집밥이란 단어 앞에는 자주 '소박한'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채소에 관심을 갖게 된 후로, 채소와 함께하는 집밥은 절대 소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물 하나만 먹어도 나물의 향, 들기름, 간장이 어우러지는 완벽한 조화가 밥알과 함께 입안에서 감돈다. 이 맛이 어떻게 케이크보다 소박할 수 있을까! 나는 물론 빵도, 과자도, 케이크도 좋아한다. 채소의 매력은 그보다 낫거나 못한 문제가 아니다. 채소 하나만으로도 온전히 맛있고, 채소 한 가지로도 놀랍도록 다양한 맛과 식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냉이와 된장의 시너지


된장은 만능 소스라서, 대개 채소들이 된장국에 들어갔을 때 웬만큼 잘 어울린다. 그래도 그중에 우선순위를 꼽으라면 냉이가 1등이다. 냉이와 된장이 만나면, 향과 식감이 시너지가 엄청나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한의원 원장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영양제나 한약을 따로 먹을 필요가 없어. 음식으로 영양을 다 섭취할 수 있으니까." 냉이와 된장을 함께 요리해 먹으면 이게 바로 약이다.


냉이의 전문적인 효능에 대해서 궁금해져서, 책을 찾아보았다.

나물 수첩 책을 보다 보니, 초록 채소들은 전부 다 약이다.


냉이는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특히 항암 효과가 뛰어난 비타민A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 냉이 잎에 함유된 베타카로틴은 비장을 튼튼하게 하고 이뇨, 지혈, 해독 등의 효능이 있다. 또한 콜린 성분이 있어 간을 튼튼하게 하고 숙취 해소에 도움을 준다.

봄철 건조한 날씨나 황사 때문에 눈이 피로하고 건조하거나 안구 건조증이 있는 사람에게 효과가 좋다. 피로 해소에 좋은 비타민 B1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몸속에 쌓인 각종 노폐물과 독소를 제거해 주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기능을 한다.

[나물수첩] 김정숙                                      


멸치육수에 된장을 한 스푼 넣는다. 끓어오르면 밥을 넣고 죽을 끓인다. 볶음밥을 만들거나 죽을 끓일 때는 햇반을 사용한다. 꼬들꼬들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잘 살아난다. 자! 이제 오늘의 주인공 냉이를 넣을 시간. 냉이를 마트에서 사 와서 씻고, 흙을 털어주고, 끓는 물에 데쳐서 예쁘게 잘라주었다. 이 정성의 빛을 볼 때가 된 것이다.

뜨끈한 냉이 된장죽을 먹는다. 밥을 먹을 때 자주 텔레비전을 보지만, 오늘처럼 밥에 집중하고 싶은 날은 정말 밥만 먹는다. 채소 생활을 시작하고, 채소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한다. 가루나 즙으로 가공한 채소가 아닌 정말 본래 모습 그대로의 채소가 가진 힘에 대해서. 이토록 따뜻한 초록이라니. 나는 초록색 채소들이 피어나는 봄이 좋다.


냉이 스콘


요리책을 보다가 '미소 팥 스콘'을 발견했다. 버터로 만드는 그 스콘에 미소된장과 팥을 넣는다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이상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짠맛이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소금 대신 사용하고, 단맛이 나는 팥을 같이 쓰면 생각보다 잘 어울리겠구나.


냉이 된장죽을 하고 남은 냉이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스콘을 만들기로 했다. 스콘반죽은 차가운 버터에 밀가루를 입히면서 잘게 자르는 것이 중요하다. 밀가루가 녹기 전에 잘게 잘게 자르며 밀가루 옷을 입힌다. 그 상태로 반죽을 한 덩어리로 뭉친 후 밀대로 편다. 반을 잘라서 서로 겹치게 두고 또 밀어낸다. 그 과정을 2~3번 정도 반복한 뒤 잘라서 굽는다. 이렇게 만드는 이유는 '결'을 만들기 위해서다. 켜켜이 쌓은 결대로 적당히 부풀어 오른 스콘의 단면은 언제나 흐뭇하다. 그 스콘의 결을 '늑대의 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모난 스콘의 부풀어 갈라진 결이 늑대의 입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이는 사람들의 상상력은 참 신기하다.

냉이 스콘은 분명 디저트인데 밥을 먹는 기분이다. 스콘 반죽 안에 냉이 다진 것을 넣고 반죽한 후에, 반죽을 손으로 뚝뚝 끊어서 자연스럽게 모양을 잡았다. 그 위에 다진 냉이를 조금 올리고 구웠다. 냉이를 올려 구워도 보고 올리지 않고 구워도 봤는데, 확실히 냉이를 올리면 반찬 느낌이다. 오묘한 매력이라, 먹으면서 혼자 풉- 하고 웃었다. 신기한 맛이야, 풉-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다. 밥을 다 먹고 냉이 스콘을 데워서 내어주었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뭐야 엄청 맛있어!' 감탄했다. 흐뭇하다 흐뭇해. 이 맛이 내가 요리를 하지. 채소를 그대로 넣어 굽는 과자의 매력은 '살아있는 과자' 같다는 것이다. 밭에서 나온 이 채소의 시간을 같이 먹는 기분이다. 이래서 봄을 다들 좋아하는구나. 웅크리고 있던 존재들이 살아나서 '나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


이토록 생기 있는 과자라니

이토록 반짝이는 봄이라니

이토록 따뜻한 초록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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