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 잰 듯 반듯하게
출근길에 나무를 다듬는 사람들을 보았다. 3인 1조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두 명은 각각 사다리에 올라 팔뚝만한 가위로 가지를 자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다리 옆에 서서 길쭉한 막대기로 나무의 각도를 잡고 있었다. 뾰족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길쭉한 모양으로 나무를 다듬으려는 듯 했다. 조경을 다듬는 사람들의 모습은 흔하게 봐 왔지만, 가지치기 가이드라인을 잡는 것은 처음이었다. 베테랑 조경사들이라 막대기를 대지 않고 눈대중으로도 멋지게 가지치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그동안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구나.
오래전부터 '감'에 대한 신비감에서 비롯된 강박이 있었다. 초밥의 달인이 무게를 재지 않고도 정확하게 밥알을 쥐는 것처럼, 단련된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정확한 감각이 있을 거라는, 아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 예술적인 '신의 경지'가 있고, 언젠가 나도 어느 한 분야만큼은 그런 노련함을 가지게 될 거라고 믿어왔다.
찻물을 끓일 때 눈으로 보이는 물의 양, 물줄기의 세기, 물을 따르는 시간, 팔에 느껴지는 무게를 통해 물의 양을 잰다. 하루에 적으면 아침 한번, 많으면 세 번까지 찻물을 끓이니까 평균 하루에 두 번으로 계산하면 일 년에 730번, 5년이면 3,650번, 15년이면 10,950번쯤 찻물을 끓이게 되는 셈이다. 만 시간의 법칙이란 것도 있으니까 만 번의 기적이 있을 법도 하다. 만 번쯤 하다보면 15년 후에는 언제나 똑같은 무게를 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그래서 매번 오직 '감'으로 찻물을 끓인다.
그러니까 그 15년동안은 매번 적거나 많은 양의 물을 끓이게 되는 셈이다. 어떤 날은 티팟이 다 차지 않을 적도로 물이 적어서 다시 한 번 끓여야 했고, 어떤 날은 티팟을 채우고도 물이 남았다. 그래도 언제나 물의 양을 재지 않았다. 15년뒤에 만 번의 기적을 통해 난 베테랑이 될 테니까. 그때까지 감을 익혀야 하니까.
티팟에 적당한 양의 물을 채운 후 그 물을 전기포트에 따르면 완벽하게 알맞은 양의 물을 끓일 수 있겠지만, 내키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나의 감각을 훈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 끓이기 말고도 이런 종류의 훈련을 몇 가지 더 하고 있다. 시계를 보지 않고 시간을 맞추는 연습을 통해 시간 감각을 키우려고 하기도 하고, 케이크 조각 내기, 책 페이지 맞추기 등등.
안타깝게도 나는 감각에 대해 아주 잘못 알고 있었다. 감각은 도박이 아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반복'만을 통해 몸이 기계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감각은 도구 없이 정확해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도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터득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로 잰듯 반듯하게 써는 감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계량하고 시간을 지켜서 구워진 빵은 언제나 맛있다. 엑셀표 아래에 TRUE / FALSE 표시가 된 데이터를 보면 안심이 된다. 더블체크란 말은 든든하고, 퇴고를 거친 문장은 아름답다. 안타깝게도 감각이 '알아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반복을 통해 무엇을 기준으로 더블체크하고, 고쳐야 할지 알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기준과 도구 사용'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경이롭다.
나무를 자르는 사람들 옆에서 나무 가지의 각도를 재주는 사람을 보고 난 후, 찻물을 끓일 때는 티팟으로 물의 양을 맞춘 후 그만큼의 물을 끓인다. 우리 다 별다를 것 없구나, 모두가 자를 대고 그어야 정확한 선을 그을 수 있구나, 싶은데 또 그렇지도 않다.
자신에게 알맞은 자를 알아보고 준비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얼추 눈대중으로 맞추어 등분한 케이크와 맞춤형 커터로 정확히 자른 케이크가 다르듯이. 신의 경지는 기계처럼 정확해 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기계를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