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책상을 샀는데
작은 방에 책상을 들였다. 책상으로 쓰려고 샀지만 책상으로 만들어진 가구는 아니었다. 가로 80cm x 폭 45cm x 높이 84cm의 화장대다. 단정한 화이트오크의 무늬와 팔각기둥의 얇은 다리가 마음에 들어서 내 마음대로 책상으로 쓰려고 샀다. 목공방에서 주문제작한 가구라 주문하고 받을 때까지 2주가 걸렸다. 매일매일 새 책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쓸 생각에 설렜다.
인스타그램에 #서재인테리어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꿈에 그리던 서재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 서재는 달랑 책상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테리어 전문가가 집 전체를 공들여 시공한 작품이다. 어디를 찍어도 예쁜 집은 구석구석 시간, 돈, 노력이 가득 들어가 있다. 그걸 알면서도 이 책상만 있으면 나만의 멋진 서재가 완성될 거라고 생각했다.
책상이 오던 날, 반차를 썼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반차까지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연차를 내려던 것을 참고 반차를 냈다. 책상이 우리집에 들어와 설치되는 모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책상이 들어올 자리를 닦고 줄자로 공간을 재고 책상 진입로를 깔끔하게 치워두었다. 사장님이 가구를 직접 운반해주신다기에 한껏 더 들떳다.
"역시,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에요. 정말 예뻐요. 사진과 다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나의 환호에 사장님이 쑥쓰럽게 고맙다고 대답하신다.
나의 서재, 나의 책상.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 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인가! 그동안 주방 식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지,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남편이 거실에서 축구를 보면 책을 들고 침대로 가서 읽었다. 침대도 꽤 괜찮은 독서 스팟이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다리도 불편하고, 차를 마시면서 읽기도 어째 애매하고, 이 책 저 책 바꿔가며 보기에 동선도 별로다. 몇 달을 저녁마다 테이블 검색으로 시간을 보냈다. 고재로 만든 빈티지한 원형 테이블? 그런데 사이즈가 될까. 작은 방에는 이미 책장 두 개에 대형 오븐과 선반까지 있어서 아주 좁은 공간만 남아있었다. 사이즈를 맞춰서 주문 제작을 할까? 80 x 40 정도 사이즈면 적당할 것 같은데. 한동안 이리저리 찾고 고민하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화장대였다. 보통의 책상 높이보다 4cm 정도 높지만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나보다 4cm 키 작은 사람이 일반적인 책상에 앉으면 비슷한 느낌이겠지, 뭐. 너비는 좀 좁지만 남는 공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어. 주문제작에다가 화이트 오크 재질이라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사자, 사야해, 살 거야!!
책상에서 앉아서 책을 좀 읽다가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는 기술이 별로여서 일까 내 눈에 보이는 것만큼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아무래도 벽이 휑해서 그런가, 벽에 거는 우드나 유리 조명을 설치해볼까. 그러고는 재빠르게 인스타그램으로 조명을 검색해서 또 다시 인테리어 고수들의 공간을 훔쳐보았다.
책상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 책을 펴서 독서를 시작하면 되는데, 이게 무슨 바보같은 일이야.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책상이 필요했던 게 맞나 싶다. 남편이 축구를 보는 시간이 아닐 때는 주방 식탁도 꽤 괜찮은 작업 공간이었다. 침실도 늦은 저녁 시간에는 적당한 독서 스팟이었다. 가끔은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것도 좋았는데.
애초에 나는 책상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의 멋진 서재 인테리어를 훔쳐보면서 그 공간의 이미지를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공간에서라면 좋은 글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음 먹은 일, 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그냥 주어진 대로 일단 하면 되는데, 공간 탓, 가구 탓을 했던 거구나. 책상을 들여놓고서야 알았다.
매번 이렇게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해보기 전에는 절대 모른다. 손에 쥐기 전에는 필요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해보고, 써보고, 그러고 나서 알 수 있는 일이었던 거라면 해볼 수밖에. 이왕 함께하기로 한 이 책상에서, 꿈꾸던 대로 좋은 책을 읽고 멋진 책을 쓰면 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