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회사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이직을 했다. 임직원 수가 900명인 회사에서 200명인 회사로 옮겼다. 동일한 업무 포지션이었고, 변한 것은 이전에는 9명이 하던 일을 지금은 2명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더 넓게 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일부분만을 담당했다면 이제 전체를 봐야 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선택한 이직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업무의 일부만 수행하다 보니 전체 프로세스에 문제가 있어도 개선하기가 어려웠다. 전체 담당자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개선 방향을 협의하고, 문서로 정리하고, 유관부서에 공유하고, 추가 의견을 취합받아 수정하고, 다시 담당자들과 정리하고, 수정된 문서로 보고하고, IT부서에 시스템 수정 요청하고, 테스트하고, 시행 후 효과를 분석하고 보고해야 했다. 뭐 하나 바꾸는 게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방식이 변해가는 시대의 업무 방식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면 책임과 권한이 애매해진다. 시스템 안에서 느슨하게 조여진다. 느슨하게 조여진다는 것은 고민할 시간이 부족해서 시키는 일 위주로 해치우듯에 일하는 것이다. 많은 양의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것 같지만 뒤돌아보면 불필요한 업무를 쫓기듯 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좀 더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회사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신입사원 시절 같은 팀이었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채용이 진행 중인데 내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 회사 역시 대기업 계열사이지만 커머스 사업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규모도, 시스템도, 역량도 아직 초기 단계였다. 그래서 장단점이 명확했다. 며칠 동안 두 회사를 머릿속에서 저울질했다.
이전 회사 <장점>
유통/커머스를 20년 이상 한 대기업
조직 내 다양한 자원과 경험 보유
인지도가 높고 고객 수가 많음
이전 회사 <단점>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자가 많고 진행 속도가 느림
오래된 조직 시스템이 만든 경직된 분위기
상사의 의견을 따르는 분위기이다 보니 실무자가 책임과 자율을 가지고 업무 하기 어려움
이직하려는 회사 <장점>
조직 구성원 수가 적기 때문에 의사결정 속도가 빠름
유연근무/자율출퇴근제 등 자율적인 업무 분위기
출퇴근 거리 가까워짐 (3km)
이직하려는 회사 <단점>
유통/커머스 사업 시작 초기의 대기업 계열사
시스템 체계와 인력자원이 부족
인지도가 낮고 이용 고객 수가 적음
한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며 정체되었다는 느낌을 갖던 시기였다. 관심 있던 산업의 스타트업에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막상 지원하려니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규칙적으로 일하고 체계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것에 잘 맞는 성향이다. 마음속의 불평불만은 늘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대기업의 문화나 시스템에 잘 적응해왔다. 이직을 고민하던 회사가 대기업 신생 계열사라는 점이 그런 점에서 절충안으로 다가왔다.
지금보다 더 넓은 책임과 자율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일하기를 원했지만, 사업 모델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면 자신이 없었다. 내 일을 책임지고 싶었지만 회사까지 책임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성숙한 산업 안에서 업무 방식과 관점을 바꾸는 정도로 충분했다. 저울질을 마치고 이직을 결심했다.
이직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유통/커머스 업계 특성상 이직이 잦은 편이다. 이전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꽤 많이 이직한 상태였다. 옆자리 사원도 아는 얼굴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2명도 같이 일하던 선배들이었다. 회사를 옮겼다기보다는, 부문을 이동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분위기를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익숙해져야 했던 것은 사람도, 분위기도 아닌 '시스템'이었다. 인력이 부족도 원인이었지만 그룹 전체적으로 IT/디자인/개발 인력들을 인하우스가 아닌 아웃소싱 방식으로 고용하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실무를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의사결정'과 '방향 수립'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이전보다 문서 작성과 데이터가 중요해졌다.
처음에는 같은 팀 동료에게 업무를 요청하는 것과 다른 회사 직원에게 업무를 요청하는 것의 차이라고 받아들였다. 직접 얼굴을 보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서와 데이터를 활용해 최대한 간결하고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해야 했다. 이 차이가 처음에는 불편하고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는데 생각해보니, 이전 회사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오히려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사람들끼리 간결한 문서와 명확한 데이터로 의견을 나눴어야 했다.
데이터 플랫폼도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이전에는 '정형화된 데이터 플랫폼'을 관리하는 팀이 별도로 있었다. 원하는 데이터는 RAW 데이터로 추출하거나, 정형화된 장표를 '개발 의뢰'해서 조회해야 했다. 새 회사는 OAC (오라클 애널리틱스 클라우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체적인 데이터 플랫폼 구축이 어려워서 아웃소싱을 결정했을 것이다. OAC를 사용하면서 놀라웠던 점은 하나의 플랫폼에서 데이터 조회와 리포트 작성이 동시에 가능하며, 데이터 업데이트가 자동으로 변경 적용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개발 요청 없이도 실무자가 그때그때 원하는 대로 '정형 장표'를 만들 수 있다. RAW 데이터를 엑셀로 가져와 차트를 만들 필요 없이 OAC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요소를 드래그하면 차트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OAC 프로그램이 손에 익으니 데이터를 다루는 업무 시간이 크게 줄었다.
이전에는 과장급 직원이 보고서 밑그림을 그리고 대리가 내용을 채우고, 사원이 내용에 필요한 RAW 데이터를 가공했다. 중요한 보고서일수록 사람 손이 필요했다. 이제는 그것을 한 명이 짧은 시간 안에 할 수 있게 되었다. OAC 프로그램의 영향도 있었지만, OAC로 만든 리포트만으로도 업무 공유와 보고가 이루어졌다. 보고서를 다듬는 과정이 필요 없었다.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면 시스템에서 조회한 데이터를 그대로 보고와 회의에 사용하고 있었다.
점점 업무가 이렇게 바뀌어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폭의 변화를 경험했다고 느꼈다. 물론 더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기업도 있을 것이고, 이 정도는 이미 구시대적이라고 느끼는 데이터 공학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터와 전혀 관련 없는 실무자 체감할 정도라면 생각보다 큰 변화이다. 무엇보다 이 이상의 변화는 쉽게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규모가 작은 회사로 옮기니 데이터와 의사결정 과정에 더 가까워졌다. 눈을 감고 코끼리 다리를 만지며 '이것이 코인가?' 더듬거리다가 실눈을 뜨게 된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방식으로 승진이 아니라 이직을 선택했다. 몇 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승진으로 업무 시야를 넓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전에 회사 자체를 그만둘지도 모르니까.
북저널리즘 <인공지능 시대의 일>을 읽으며 변화의 흐름을 반 발짝 더 일찍 경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답답해하던 조직의 한계는 이미 그 정점을 지나 마지막 단계였던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었고, 앉아있는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은 '감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실무는 인공지능이 도맡고, 사무직 노동자는 인공지능이 수행한 업무를 파악하고 최종 승인하는 관리자의 역할로 승진하는 셈이다. (중략) 앞으로 인공지능이 실무를 도맡아 하면 인간 직원의 역할은 기획과 전략으로 넘어갈 것이다. 전략 수립과 프로젝트 기획은 이제 모두의 역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깊은 경험과 치열한 통찰을 요구한다.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파악하고 미래의 비전에 공감하고, 현재의 업무 프로세스가 도입된 이유와 맥락을 이해하고, 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과정이 축적되며 좋은 전략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도입될 인공지능은 실무뿐 아니라 새로운 기획과 기업 전략 수립 과정에서도 통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디지털 전환으로 전략 수립은 이전보다 쉬워지고 빨라질 전망이다.
- 북저널리즘; 인공지능 시대의 일, 우정훈
기존 문서의 그래프와 다른 점은 대시보드 솔루션이 데이터 웨어하우스와 직접 연동된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며 추가된 새로운 데이터가 대시보드에 반영되고 필요한 인간 직원에게 알람의 형태로 업데이트된다. 이와 같이 빅데이터에서 발견된 통찰은 빠르게 시각화되고 공유된다.
- 북저널리즘; 인공지능 시대의 일, 우정훈
앞으로 혁신적인 회사가 직원에게 기대하는 것은 성실성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일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인공지능과 경쟁할 이유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은 인공지능이 없는 능력이 있다. 인공지능을 가르치고, 관리 감독하는 능력이다. 더 나아가 업무 처리의 과정을 꾸준히 개선하고 혁신하는 새로운 역할이 생긴다. 사무실은 이제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일을 생각하는 곳이 된다.
- 북저널리즘; 인공지능 시대의 일, 우정훈
요즘은 스스로 <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회사와 산업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스타트업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얕으면 또다시 정체감과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내가 만들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새로운 회사에 온 지 6개월 된 지금 시점에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