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름답다
언어는 사고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글이 되면서 왜곡과 상실로 뒤틀린다.
이런 경험이 종종 있다. 전선에 스파크가 일듯이 머릿속으로 엄청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은 흔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놓치지 않고 즉시 메모장을 꺼내어 그 생각을 적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글로 써놓고 보니 별 볼일 없는 메모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 생각이 애초에 별로였나 보지'하고 넘겼다. 하지만 몇 번 더 그런 경험을 겪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입체적인 생각'을 '평면적인 문자'라는 도구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이다. 문자라는 도구는 2차원에 속해 있어서 3차원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면 오랫동안 갈고닦아야 한다. 경험이 쌓이고 사고가 성숙할수록 어휘력과 관찰력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바를 글로 옮기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더 폭넓은 어휘력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섬세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시인이란 바로 그 생각과 문자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뭔가 조금 다르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기도 하고, 언어라는 도구의 제약을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며 비틀어 버리기도 한다. 언어의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글맛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언어로 전부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언어 그 자체의 소리와 모양과 뜻을 이용해버리는 것이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비는 나를 확실히 다그치는 것 같았다. "비(非) 비(非) 비(非)!" 떨어지며 "잘못됐어, 잘못됐어, 잘못됐다고!"라고 나를 한동안 몰아붙였다.
- 다독임, 오은 산문
오은 시인의 산문집에서 그 특유의 '글맛'을 만났다. 시인이 쓴 산문집은 말놀이쟁이 특유의 리듬과 유희가 있다. 단어를 마음껏 부릴 줄 아는 이들의 재주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언어의 한계를 이겨보려고 촘촘하게 감각의 촉수를 뻗으며 다른 이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낼 때, 우리는 그것을 '필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책 『보통의 언어들』 에서 김이나 작사가는 예민한 감각으로 언어의 빈틈을 메운다.
'어감'이라는 것은 고유한 것이기보다는 그 단어를 사용하면서 얻어진 기억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중략)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그 이유를 헤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서러움은 일단 따뜻한 집에 들여 밥 한 술 떠먹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고 싶을 때는 슬픔 대신 서러움을 쓴다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붕 뜨게 하기도, 한없이 추락하게 하기도 하는 역동성을 띤 반면 좋아하는 마음은 온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리게 해주는 안정성이 있다.
-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이것은 '김이나'라는 촉수로 포착한 감정이다. 우리는 타인의 촉수에도 공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지극히 섬세하게 언어가 메우지 못한 균열 사이를 파고들려는 노력이다. 전하고 싶은 '느낌'을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개인이 만들어낸 언어 속에서 비언어적인 노력을 발견한다. 언어인 동시에 감각, 감정, 느낌, 분위기, 상황, 마음인 것을 알아차린다.
같은 이야기를 영화보다 책으로 접할 때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한다. 비언어 요소(표정, 분위기, 배경, 목소리)가 언어 요소에 비해 의도와 생각을 더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 마디 위로보다 순간의 포옹이 낫고, 당신을 믿는다는 말은 정직하게 바라보는 눈빛과 몸짓을 이겨낼 수가 없다. 언어는 비언어에 비해 부족하고 살짝 다르다. 그 뒤틀린 틈이 끼어들 여지를 주는 것이다. 문자 언어가 담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을 한다.
목소리도, 풍경 이미지도, 인물의 표정도 없는 글에서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감각에 기대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제한적일 때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을 때 어떻게라도 더 해보려는 것처럼.
언어와 비언어의 거리감을 즐기는 것이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이긴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언어의 샘플을 많이 접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의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알고 난 후에 변용이 가능한 것과 같다. 회사에서 상사가 신입사원들에게 자주 "너희는 아직 때가 묻지 않았으니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져와봐라." 고 한다. 이것은 불가능한 요구이다. 뭐라도 알아야 어떤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할지 가닥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막힐 때 머리를 쥐어 짜내는 대신 남들의 말놀이를 구경하러 간다. 시인, 작사가, 카피라이터, 소설가들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다. 좁은 책장에 어깨를 맞대고 쉬던 책들이 제 역할을 다하며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오래 달리기를 끝내고 물을 마시는 아이처럼 벌컥벌컥 글자를 마신다.
언어는 불완전하다. 언제나 그립고 손을 뻗어 만지고 싶고 마셔도 마셔도 부족하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눈에 보일 듯 말 듯 언어와 나 사이의 거리가 아무래도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