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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눈물 없이,

[영화]어느 가족(万引き家族, Shoplifters, 2018)

by 진미


감독 : 고레에다 히즈카즈

주연 : 릴리 플랭키(오사무 시바타), 안도 사쿠라(노부요 시바타), 마츠오카 마유(아키 시바타), 키키 키린(하츠에 시바타), 죠 카이리(쇼타 시바타), 사사키 미유(유리)


- 2018 칸 황금종려상 수상


본 글은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된 글입니다.

7월 26일에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중간 구분선 이후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꼭꼭 "뒤로 가기"를 부탁드립니다.



영화를 다 보고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사회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어 번의 눈물, 혹은 감동, 혹은 감독에 대한 극찬이었다. 가족영화이지만 고레에다 히즈카즈 감독의 특유한 색채는 눈물바람을 일으키지 않는다. 앞선 사람들의 모든 반응은 아마 눈물 바람을 일으키지 않는 가족영화라는 점일 것이다.

감독의 지난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지만 유독 이 영화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던 이유.


돌아오는 길 내내, 어떠한 가족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 화목한 4인 가구 혹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 1인 가구, 서로 할퀴고 물어뜯기만 하는 가족. 그 어떤 모습의 가족도 떠올릴 수 없었던 영화라니. 심지어 나의 가족을 빗댈 수도 없는, 그렇지만 특수한 형태의 가족이라고만 단정 짓기도 어려운 모습들 속에서 단서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부자처럼 보이는 두 남자의 도둑질로 시작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손동작, 직원에게 들킬까 막아주는 오사무(릴리 플랭키)와 쇼타(죠 카이리). 필요(?)한 물건들을 훔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 먹는 겨울의 고로케가 맛있다고 낄낄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빠와 아들의 모습이었다. 고로케의 김이 식기도 전에 현관 밖에서 떨고 있는 유리(사사키 미유)를 집으로 데려 온 오사무는 따뜻하고 정이 많은 동네 아저씨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그렇게 가정 폭력으로 인해 문 밖에서 떨고 있던 유리를 나무들로 둘러싸인 비밀스런(?) 그들이 살고 있는 목조 주택으로 데려오면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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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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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등장인물을 세세하고 면밀하게 하나씩 다뤄주고 있진 않는다. 하지만 다 비밀이 있어 보이고 가족인지 의구심인지를 품게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처럼' 보이는 그림을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는 시간 내내 나는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을 자꾸 떠올리게 됐다.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이 적절한가 라는 질문이었다. '어느'라고 하는 단어에 대한 집착을 품게 하는 번역이었다. 피가 섞인 진짜 가족 구성원이 아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로 볼 때 어느 곳에도 없을 가족이지만, 있을 수도 있는 가족인 것이지, 보통과는 다른 무엇을 지칭하는 '어느' 가족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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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각자의 몫을 하고 있다. 연금을 받아서 가족의 생계 및 보금자리를 주고 있는 할머니,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이자 언니 역할의 그녀. 현장 노동자로 일하지만 마트의 생필품을 훔쳐다 주는 가장의 역할의 그. 그리고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아들 쇼타, 가정 폭력으로부터 도망칠 힘이 없는 유리이지만 쥬리. 인생의 불만보다는 잘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가짜 이름을 사용하는 아키까지.


할머니 집에 찾아온 복지사 때문에 뒷 문으로 나가게 된 쇼타와 유리를 통해 이 가족이 서로를 연명하고 끌어가는 익숙한 과정들이 드러난다. 아빠인 오사무는 현장에서 다리를 다쳐오면서 집에 머물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내 눈에는 원해서인 듯), 그렇게 집에 머물며 그들의 관계를 더욱 드러난다. 우리가 상상하는 혹은 경험하고 있는 가족이지만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가족.


영화는 그들이 뿔뿔이 흩어질 듯한 위험한 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위태해 보인다. 유리의 실종과 관련한 뉴스가 나오면서 그들은 유리로 알았던 소녀를 린으로 바꾼다. 쉽게 바꿔질 수 있는 거였다. 그들의 삶은 그러했다. 몸을 뉘이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만인 거다. 아직 누구의 물건도 아닌 물건을 가져다 쓰면서 고로케를 라면에 넣어 먹는 게 좋은 줄 서로 나누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유괴가 아닌지. 가족이 아닌데, 가족인지. 치정살인으로 얽힌 오사무와 노부요는 과연 그대로 용서받고 정당방위인 것처럼 살 수 있는 것인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죽은 할머니를 땅에 파묻고 마는 그들은 과연 범죄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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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에겐 시키지 마"라며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 말에 흔들리기 시작한 쇼타는 오사무가 자신을 어디서 주워 왔는지 그리고 오사무가 마트에 진열된 물건은 누구도 주인이 아닌 것이라는 말에 따랐지만 차를 부수고 비싼 명품 가방을 들고 뛸 때, 쇼타는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나보다.

마트에서 린의 실수로 들키게 될 위기에 놓이자 쇼타는 마트를 뒤집어 놓고 도망친다. 그로 인해 잡힌 가족들.

결국 그들의 상처, 그들의 이야기가 드러나고 만다.


시종일관 따뜻한 모습으로 보여지는 가족은 한순간 전부 흩어지고 서로가 미처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아팠던 지난 이야기와 상처가 전면으로 드러나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의 상처가 슬픔을 짜낼만큼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서가 아니라 그래도 살아질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나도 '어느가족' 품안에 있어서는 아니였을까.


몰아치는 눈물없이 가슴 한 켠이 아련해 지는 것이 고레에다감독의 결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슬프지 않고 그래도 아프지만 따뜻한.


가족이란 말에 대해 이벤트를 하던 해당 시사회 영화는 보기 전과 보기 후에 가족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선을 갖게 해 준 온정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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