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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미 Oct 10. 2020

더 이상 밤길을 걷지 않을래.

[여는 글]




밤.

밤은 늘 취해있었다. 낮의 햇볕에 헤매다가도 노을이 조금씩 내려앉으면 짠한 감정에 동요됐다가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하면 술잔 앞에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일 때도 있었고 혼자 일 때도 있었다.

낮은 그럭저럭 지나가지지만 밤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어둡고 때로는 춥고 때로는 너무 더웠고 때로는 온도마저 없는 느낌이었다.

점점 검은색 옷을 많이 샀다. 혹자는 검은색 옷을 특정시기부터 스스로도 모르게 구입하고 입고 있다면 우울증일 수도 있다고 했다는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살이 쪄서다. 살이 쪄서 검은색 옷을 입게 되니 우울해졌을까.

살이 쪄서 우울해져서 검은색 옷을 사 입었을까.

원래 검은색을 좋아했던 거 같은데.

결국 살이 문제구나.

모르겠다. 도대체 알 수 있는 거라곤 나의 몸무게. 나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각. 오늘의 날짜. 내 통장의 잔고.  세탁완료까지 남은 시간. 도통 숫자로 된 것뿐이다. 이토록 명료한 것이 없을 수 있을까.


한 때 밤은 낭만이기도 했다. 언제였지.

기억나지 않은 숱한 밤들 중에 사랑의 열병 때문에 세상 누구보다 처절하게 노래 불렀던 날도 있었고 청춘의 열병 때문에 나를 재단하는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는 날도 있었고 엉엉 울었던 날들도 있었던 거 같고, 슬픔, 아픔, 고통 보다 더 큰 웃음과 목소리로 취해갔던 날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들이 전부 돌이켜보니 밤의 낭만이었네 싶다.

지금은 좀처럼 기억나지 않은 숱한 밤들처럼 취해있지 않다. 더 기억할 것이 없는 밤들을 보내고 있다.

어쨌든 밤 같은 낮이든, 밤에 밤이든, 자꾸 내가 걷는 길이 어두워지니 벗어나고 싶다.

더 이상 밤길을 걷고 싶지 않다. 같이 걸어가던 누군가가 있었어도 어두워 보이지 않으니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작은 불빛에 속아 헛된 희망을 갖게 되는 것도 지겹다.


더 이상 밤길을 걷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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