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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사물에 대한 나른한 단상(6)

by 진미


#1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유달리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은 없는데 시력은 왜 나빠진 걸까. 중학교 시절 나는 조금씩 멋을 부리고 싶었다. 교실 칠판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자마자 나는 냅다 엄마에게 달려갔다. 안경을 맞춰야 한다고. 나는 안경을 쓰고 싶었다. 어른처럼 보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경 때문에 다 망쳤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밑도 끝도 없이 나빠진 시력 때문이다. 한 번 안 좋아진 시력은 돌아오지 않고 통통히 젖살이 오른 내 얼굴과 아주 동그랗게 잘 어울려 지난 학창시절을 장식하고 있다.

좋아하는 색의 테를 고르고 시력 검사를 한 뒤 받아든 안경을 쓰곤 내가 상상했던 나의 모습이 아닌 것에 충격이었다. 좀 똑똑해보이는 모습도 아니고 정말 공부만 하게 생긴 듯한 자태에 혼자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모든 안경이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건 아니었구나.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렌즈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하드렌즈라는 것인데 처음에 4시간 착용 후 8시간 착용 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늘려 적응시켜야 했고 가격도 당시 안경보다 비쌌다.

한 마디로 눈에 딱딱한 렌즈를 넣고 적응 시간을 거쳐 내 눈처럼 체득화 시켜야 하는 것이다.

좋았다. 안경으로 인해 느꼈던 모든 불편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각막 손상이 심해지고 각막염까지 걸려 지독한 난시가 생기고야 말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나는 렌즈를 착용할 것 같다. 심한 각막염 이후 병원에선 나의 눈동자는 굴곡이 많기 때문에 정 렌즈를 끼고 싶으면 원데이 소프트 렌즈를 착용하라고 했다.

올커니, 그게 더 편하지. 세척할 필요도 없고 끼고 버리면 되니까. 냅다 엄마한테 말하고 나는 원데이 소프트 렌즈로 바꿨다. 처음엔 산소 투과량이 많다는 걸로 그 다음엔 부드럽고 눈이 덜 건조하다는 걸로 그렇게 나는 때로는 원데이가 아닌 채로 며칠동안 착용하기도 했다. 편하고 가벼웠다.

서클렌즈가 유행할 때쯤 커보이는 동공이 인상을 달리 보이게 한다는 걸 알았고 바로 원데이이면서 서클렌즈인 형태로 바꿨다. 그렇게 아직도 그 검고 큰 동공에서 벗어나지 못해 수술도 하지 않은 채로 렌즈빨로 연명하고 있다. 그러다 하나 둘씩 집에 쌓여가는 안경테를 보곤 커진 동공과 잘 어울리는 검정 불테를 선호하게 된거다.

때로는 심하게 약해진 눈을 위한 보호안경이라는 명분으로 때로는 좀 더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집에선 정말 나의 시력이 고스란히 반영된 안경으로 일명 '뱅글이'가 된다.

가끔 그런 나의 모습을 김피디가 쳐다보고 한 마디 한다. 나의 뱅글이 안경을 위로 올리면서 "00이 돌아오라고 해." 그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예뻐보이기 위해 난 눈을 혹사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힐을 신거나 매일 화장을 하지 않는 나에게 지금은 렌즈를 뺀 모습이 가장 어색한 모습이고 가장 못난 모습처럼 보인다. 앞으로도 몇 십년간 더 혹사 당해도 건재해주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제발.



#2

안경 쓴 남자에 대한 로망


공원 쪽에 다다랐을 때 그는 도저히 나로선 걸터 앉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곳에 앉아선 흘러내린 안경을 쓸어올리며 손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집을 나설 때 기다릴 그를 생각해 서둘렀던 걸음은 일부러 재생하지 않는 것처럼 느리디 느린 화면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그 모습만 쳐다보며 걸어갔다.
항상 안경 너머로 나를 보는 듯한 눈빛을 느끼던 때였다. 안경을 벗은 모습은 피곤한 눈을 부빌 때 뿐이었고 그 찰나를 볼 수가 없었다. 뿌연 안경을 좀 닦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해도 벗어주며 닦아 달라 하지 않던 그였다. 뿌연 채로 먼지 낀 채로....... 그래도 내 눈엔 안경 너머 그의 눈이 보였다.


여자의 안경보다 남자의 안경이 더 로맨틱하다. 연예인이라는 사람에게 푹 빠져 있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티비에서 지금처럼 안경 쓴 남자를 많이 볼 수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가수, 배우들이 그러했고 좋아했던 남자도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나 안경 쓴 남자를 볼 수 있고 브랜드도 셀 수 없이 많아졌으며 많은 연예인들이 렌즈가 없는 안경으로 패션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내 주변 남자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시력조정수술을 했음에도 가끔 안경을 착용하는 김피디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쓰는 경우만큼이나 그냥 쓰는 쪽도 많다. 이유가 뭘까 보다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안경은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

그리고 안경을 쓴 남자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내가 안경이 참 잘 어울리는 남자들과 연애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답은 뻔하다. 안경을 통해 좀 더 날카롭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고 반면 순진하고 순수해보이는 모습도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얼굴에 무엇을 하나 얹어 놓았을 뿐인데 이미지는 달라진다. 그렇게 다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고 벗어도 멋있고 써도 멋있는 얼굴을 좋아한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결국 잘생긴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3

때론 선명한 것이 기분 나빠 안경을 집어던지거나 렌즈를 뺀 채로 돌아 다닌 적도 있다. 물론 지금처럼 많이 나쁘지 않은 상태였고 가까운 누군가 정도를 분간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 때는 왜 그런 우울함이 가득 차 있었는지 모르겠다. 귀에는 수 십번 들은 듯한 발라드 한 곡 꽂아놓고 앞이 뿌연 채로 길을 걸었다. 돌뿌리에 걸리기도 했었다. 그렇게 안경을 벗어서 본 세상은 흐릿하고 경계가 없어 보였고 모든 빛은 번져 있었다.

그 어린 시절의 마음은 세상을 똑바로 보기 두려워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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