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똑 똑 똑

계산기

사물에 대한 나른한 단상(5)

by 진미

#1

수포자. 나는 수포자다. 수학을 포기한 사람.

사실 수학을 포기했다기 보단 산수를 잘 못한다.

고로 돈 계산을 잘 못한다.

우리의 수학과 산수란 계산 아니던가?

한국에서 수학이 학문은 아니더라. 시험을 위해 공식을 외우듯 어려서 구구단을 외우듯.

생활에서 손해 보지 않게 하기 위한 계산.

그리고 계산기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턴 쉴 새 없이 그 녀석을 두들겨 댔다. 하지만 예전엔 휴대하기 어려웠고 주변 사람들은 계산기를 두들겨 답을 내면 그 간단한 거 조차 못하냐는 눈총이었다.


#2

어려서 엄마가 슈퍼를 했다. 동네 구멍가게였지만 마트나 편의점이 많지 않았던 때라 엄마는 새벽 6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연중무휴 가게를 열었다.

아직도 그 구조가 선한데....

좁은 긴 통로에 벽 쪽 선반, 가운데 짧은 선반 그리고 책상 위에 큰 계산기. 그 뒤쪽 선반과 작은 냉장고가

깨알같이 다 들어가 있고 문을 나서면 아이스크림 냉동고. 그 앞에 박스를 뜯은 채로 늘어선 과자들.

우유 등이 있는 냉장고 사이로 통로.

그곳을 갈 때면 난 동네 왕이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게 기어들어갔었다. 바깥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동고에 손을 넣어 몰래 가져가고 과자도 몇 봉지 집어 들고 동네 골목으로 가면 그렇게 동네 녀석들이 달라붙었다. 그야말로 슈퍼집 딸이었다.

슈퍼 딸.

하지만 이런 나를 어렵게 하는 건 엄마가 잠깐 가게를 봐달라고 할 때다.

바코드가 없던 때였다. 띡 찍는다고 모든 제품의 가격이 나오지 않았고 모든 물건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계산기에 두들겨 합산이 나와야 했다. 숫자라면 계산이라면 무서워했던 나는 10원 단위까지 떨어지는 가격을 계산하고 얼마 받았는지 넣고 거스름돈을 주는 일이 무척 어려웠다. 그때 엄마는 이건 얼마, 이건 얼마, 그래서 얼마구요. 거스름돈도 척하고 내주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너무 대단해 보였고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숫자가 무서웠고 접근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3

4921bc45-65fb-48f8-9694-eb05b7701f8b.png 날 두들겨서 나온 답이 정답은 아니야. 언제고 잘못 누를 수 있잖아.

회사를 다니면서 꼭 해야 하는 것이 엑셀로 함수를 입력해 합산을 도출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매장 마감시에는 꼭 돈을 다 세어놓고 다음날 시제를 세팅해주고 가야 했다. 아, 어디 가도 돈을 세고 돈을 정리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던 내게 또 한 번의 큰 시련이었다.

남들이 한 번에 할 수 있는 걸 나에게는 2-3번이 기본이었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이제는 계산기가 핸드폰 안으로 들어와 얼마든지 바로바로 계산이 가능하다 보니 암산과는 이미 더 먼 사이가 되었다. 어렸을 때 구구단이라도 잘 외워두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여지없이 지출결의서를 쓰거나 회사 돈을 쓸 때마다 머리를 마구 굴리지만 결국 손에는 계산기가 들려있다. 그 계산기를 곰곰이 쳐다보다 보니 내가 숫자 하나만 잘 못 눌러도 계산의 답은 틀렸다.

맞는 답이 있는 것이 계산인데, 난 늘 틀리는 거다. 엑셀을 해도 마찬가지다. 함수 수식을 잘 못 넣거나 셀 지정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그 안의 숫자가 다르게 적혀있으면 어김없이 틀리는 거다.

어쩌면, 암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계산의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잘 숫자를 넣는지 그 과정이 새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암산, 계산을 잘 한다는 건 똑똑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꼼꼼하다는 것이겠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그렇지. 사실 난 꼼꼼하지 않은 거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고.

억지로 끼워 맞춘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저 난 그게 맞다고 느낀다.


어렸을 때 숱한 계산과 거스름돈을 내어주는 일을 척척 잘 하는 엄마는 숫자에 빠르고 꼼꼼한 사람이었던 거다. 물론 똑똑하기도 하고.


계산기는 몇 번이고 틀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주었다. 기계로 하는데 자꾸 틀리니 말이다. 하지만 기계에 입력해야 하는 게 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계가 해주는 빠른 답만을 위해 마구 눌러 댔던 건 아닐까 .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결국은 그걸 입력하고 과정을 만들어 내는 건 '나' 자신이라는 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물통/텀블러(tumbler) : 불편함을 담아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