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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Aug 19. 2015

그럴 순 없지. 암 그럴 순 없고 말고!

꿈만 꾸다가 인생을 다 보낼 순 없어. 일단 저지르자! 파리에서의 생일

고등학교 시절, 꿈만 꾸던 곳이 있었다.

해외라곤 일본을 가본 것이 전부였다. 그도 30년 만에 엄마가 이모를 찾았는데 이모는 이미  오래전에 재일교포 2세와 결혼해 일본에 건너가 살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이모를 만나러 갔던 것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본 기억이다. 중학교 때나 지나 일본으로 유학 가볼래?라는 부모님의 권유도 있었다. 지금은 그 권유를 왜 거절했을까 하는 후회가 된다. 어쨌거나 그 뒤에도 줄곧 일본에만 갈 일이 많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 이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마음 한 구석에 크게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에펠탑"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종종 '마흔에는 파리에서 살 거야.' 라 말했다. 파리가 그렇게 가고 싶었다. 아주 막연히.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작가연수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개인적인 질문을 무척 싫어하시는 선생님께 술자리에서 미친 척 질문을 했다. 선생님의 서른은 어땠냐고.  그때 곧 서른을 앞두고 있던 터였다.

선생님은 그런 질문에 무슨 대답해야 하냐며 시큰둥하셨지만 모든 살림을 다 팔아 파리로 갔다고 했다. 딸과 함께.. 그때 나는 또 생각했다. 그래. 파리에 가야 해.

김기덕 감독이 영화를 배우기 시작한 때도  서른두 살에 파리에서였다. 나는 서른이 되는 생일을 파리에서 맞이하기로 고등학교 시절 계획을 앞당겼다. 하지만 현실은 도무지 그 곳까지 갈 수 없었다.


영화에서 보는 파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 많았고  점점 프랑스와 관련한 영화를 보게 됐지만 절대로 공부는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직접 가서 다 볼 거니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회사 생활 2년 차로 접어들 때쯤, 드라마 작가로 공부는 하지만 앞이 깜깜한 느낌이 들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쉬고 싶었다.

첫 회사였고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파리로 갈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이하 워킹)가 만 31세까지 였다.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때려 치웠고 퇴직금을 받았으며 불어 학원을 등록했다. 

불어를 배우는 중, 워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파리의 어마 무시한 물가를 알았고 파리는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다. 일단 불어가 그랬다. 너무 어려웠다. 5~6명이서 받는 수업에서 나만 수도 없이 뒤쳐지고 선생님의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가야 하니까 열심히 배우고 복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점점 서류 접수를 해야 될 때쯤이 되어서 알게 된 현실은  한두 달간의 불어로 가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이고, 파리는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그렇게 워킹의 꿈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갈 수 없구나. 하고 체념하던 난 이렇게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서 1년을 살 수는 없더라도 단 며칠이라도 가보는 건 어떨까 하는 방향으로 점점 흘러갔다.


있는 돈을 탈탈 털어 40일간의 비행기표를 끊었다. 파리를 시작해 런던으로 해서 돌아오는 유럽여행으로 말이다. 이왕 회사도 때려 치웠고 배운 불어  한두 마디라고 하고 와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두 달간의 준비로 나는 40일간의 유럽여행 일정을 짜고 파리에 내렸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과 다를바 없이 샤를 드골 공항은 파리에 왔다는 느낌을 전혀 전해주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다. 인천 국제공항이 참 잘 지어지고 잘 꾸며져 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렇게 나는  서른한 살의 생일을 파리에서 맞이했다. 생일이라고 비상구 좌석까지 선물 받아가며 난  마음속에서만 있던 파리를 십여 년 만에 밟았다. 저녁에 도착한 파리는 간단히 짐을 풀고 신혼여행으로 하루 전에 도착한 친구 부부를 에펠탑 앞에서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다 늦은 저녁 불이 들어와 다리 건너편으로 반짝 거리는 에펠탑을 보고선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정말로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인가.


친구 부부와 결혼, 생일을 축하하면서 와인과 파스타를 먹고 늦은 밤 헤어졌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 다시 길로 나갔다. 아직도 내가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을 수 없어 걷고 또 걸었다. 에펠탑은 심지어 세 번이나 다른 각도로 보고 또 봤다. 그리고 눈물로 흘렸다. 무언가 내가 해냈다는 느낌도 들었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하는 음식을 혼자만 다 먹을 수 있는 거대한 차림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날씨는 아름다운 조명이 되었고 사람들은 나를 위해 움직여 주는  듯했다. 춤을 추는 듯 보였고 나는 드디어 이 곳에 왔다.


40일간의 일정 중 파리에서 만의 일정이 8일이었다. 무조건 가장 좋은 컨디션, 가장 돈이 많을 때 파리에 가장 오래 머물고 싶었다. 이왕 온 거니 다른 곳도 가자였지만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지인의 집을 빌려 머무는 동안 그 집에서 걸어서 갈만 한 위치에 있는 것이 뤽상부르 공원이었다. 

처음엔 그저 판테온에 가는 길에 큰 공원이 있길래 들렸을 뿐이었는데 노트르담을 갈 때도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와 수다를 떨 때도 그 곳을 찾았다. 파리에 대한 공부를 너무 하지 않은 탓에 나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나의 습관대로 갔던 길을 또 가고, 갔던 곳을 또 갔다. 마치 이 곳이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곳인처럼.......


뤽상부르 공원에서 노트르담으로 걸어가는 길에 소르본 대학이 있는 거리를 걸을 수 있는데 그곳은 여느 대학가와 비슷하게 저렴하고 개성 있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판테온이라는 거대한 신전에서 내려 오는 길에 쉴 수 있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나와 대학가로 이어지는 길은 내가 며칠 동안 걸었던 길이다.

근처 저렴한 옷 가게에서 북유럽으로 가는 친구의 옷을 고르기도 하고 이색적인 가게를 둘러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아무런 준비도 공부도 없이 온 것이 때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보이게 하고 모르는 것을 지나쳐 가게 하면서도 소소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점이 있었다. 길을 잃는 게 여행의 묘미라는 말이 딱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남들처럼 여행책자를 들지 않고 아는 것이 별로 없어도 충만한 기분.


만약 워킹의 비용에 좌절해 있기만 했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충만한 시간을 나는 겪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에는 쉬울지도 모르는 이 길들 이 나에게만 무척 어렵게 여겨진다면 그거야 말로 떠나 봐야 한다.

1년 동안 파리에 가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유럽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전부 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다녀와서 어쩌려고 라는 걱정을 보태주었다. 다녀와서의 문제를 계속 염두 해둔다면 어딜 갈 수 있겠는가. 때로는 나를  합리화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순 없지, 암 그럴 순 없고 말고. 그렇게 한 번쯤은 내가 하고자 했던 것만 쳐다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인생은 정말로 단 한 번 뿐이고, 저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여행 후 나는 잘 알게 되었다.


지난 제주도 여행에서 만난 게스트 하우스 일행 중 누군가도 조만간 일을 그만두고 내년엔 유럽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꼭 가라고 말했다.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건 전체로 볼 때 그러한 것이고 때로는 내 맘대로 앞 뒤 재지 않고 일부분만이라도 마음 먹은 대로 해봐야 한다.  그래 봐야 정말 인생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여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가치관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인생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충만했던 시간을 꽂으라면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파리에 갔던 일, 파리에서 나의 생일을 맞이 한 일이라고  몇십 년 뒤에도 말할 것이다. 


파리 이후에 스위스,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체코, 독일, 벨기에, 영국까지 나는 무척이나 열심히 걷고 여전히 길을 잃어가며 돌아다녔다. 정말 인생에서 몇 없는 돈과 시간이 딱 맞았던 시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일을 때려 치우고 마음 먹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또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암! 그렇고 말고!




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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