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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issa Jul 23. 2023

스위스 일상생활에 관하여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은 저녁 6시에서 7시

내가 처음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문화차이로 당황했던 적이 몇 번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스위스의 높은 물가에 한번 놀랬고 (이미 익히 소문은 들었지만 막상 와보니 생각보다 더 비쌌다) 다른 하나는 짧은 영업시간이었다.


매년 Mercer에서 실시하는 cost of living city ranking에서 홍콩, 싱가포르, 취리히에 이어 제네바는 4위 (2023년 기준)를 차지했다. 처음 학생으로 제네바 도착해서 친구와 햄버거 사 먹으러 갔다가 메뉴를 보고 허걱 했던 기억이 있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먹었던 햄버거가 너무나 별거였다. 기본 버거세트가 30프랑, 캐나다 달러로는 45불 정도, 원으로 따지면 5만 원 정도 한다. 이런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제네바에 살면서 반강제적으로 나의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매일 나가서 생각 없이 사 먹으면 통장 잔고 비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요리를 하려면 장을 봐야 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았다. 두 번째 문화차이 - 가게들의 짧은 영업시간 때문이다.


모든 가게들이 일요일에 닫는 것은 당연지사, 평일은 저녁 7시, 토요일은 더 일찍인 저녁 6시에 닫는다. 회사 퇴근이 6시인데 회사 끝나고 바로 달려가도 항상 간당간당한다. 그렇다고 보스한테 매번 “저기 죄송한데 저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장 좀 봐야 하니깐 좀 일찍 퇴근할게요” 하기도 그렇고 몰래 일찍 나가기도 눈치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스위스의 슈퍼마켓 체인 Migros

덕분에 나의 퇴근 후 일과는 엄청 단순해졌다.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은 저녁 6시부터 7시, 그리고 가장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원래 나는 프로계획러라고 할 만큼 계획을 짜는 것을 좋아한다. 1년 단위, 분기별, 달별, 주별, 일별 계획을 짠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Moleskin 다이어리에 오늘 할 일을 적는 것이다. 그것도 아침 점심 저녁에 칸을 나눠서 시간별로 적는다.


이제 나의 플래너에는 장 보는 계획까지 다 적혀있다. 이번주에 어떤 요리를 할지부터 생각해 무엇이 필요한지 어디서 살지 미리 적어본다. 하나의 슈퍼마켓에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스위스를 과대평가한 거다. 슈퍼마켓마다 있는 것이 다르기에 잘 생각하고 동선을 짜야한다.


예를 들면 요즘은 날씨가 더워서 메밀소바를 자주 해 먹는데 재료를 하루에 다 사기 위해서는 동선과 시간을 잘 계산해야 한다. 메밀국수와 간장소스는 다른 곳보다 30분 일찍 닫는 일본마트에서 사야 되고, 파와 무는 동네 슈퍼마켓 (Co-op, Migros, Denner)에서 살 수 있지만 메추리알은  Manor라고 백화점 슈퍼마켓을 가야지 살 수 있으니, 일본마트 갔다가 나머지 재료는 모두 Manor에서 사는 걸로 정한다. 일본 마트와 Manor 두 곳을 한 시간 안에 방문하려면 빠릿빠릿 움직여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주 목요일은 슈퍼마켓이 저녁 8시까지 연다.


점심시간에 처리하면 되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다. 모든 상점이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가게들이 12시 반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 동안 문을 닫는다. 특히 우리 집 옆의 세탁소는 아침 9시에 열고 점심시간에는 휴식시간을 갖고 (문을 닫는다는 말이다) 저녁에는 6시 반이면 퇴근이다. 옷을 맡기기도 찾기도 쉽지 않다. 가끔씩은 여기 사람들은 돈을 벌 생각이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부터 어떻게 이 물가 비싼 곳에서 비즈니스를 유지하지 하는 걱정까지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래서 나의 토요일은 미뤄뒀던 집안일을 처리하는 날이다. 장도 여유롭게 보고, 집에 필요한 것도 사러 가고, 시내 나가서 가게들도 구경도 하고 말이다. 대신 일요일은 하이킹을 가든, 스키를 타러 가든 도시밖으로 나간다. 다들 토요일에 밀렸던 집안일을 하는지 일요일에 산이나 호수에 사람이 더 많은 거 같다.


시간이 지나니 처음에는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문화차이가 지금은 오히려 내 일상생활에 단순함을 불러왔다. 그리고 묘한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토론토에서 살 때는 회사도 바빴지만 회사 끝나고의 삶이 더 바빴던 거 같은데 제네바에 와서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유로피안의 리듬으로 나도 모르게 타고 있는 것 같다. 토론토 시절은 내가 좀 더 젊었기도 했고 또 회사 끝나고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들도 트라이하고, 여기저기 이것저것 배우러 돌아다니고, 쇼핑도 늦게까지 하는 게 피곤했지만 즐거웠다.


예전에 Harvard Health에서 쓴 기사에서 선택지가 많은 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한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은 이 말에 더욱 더 공감한다. 제네바는 저녁 7시 이후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대도시처럼 많지는 않지만 그 덕분에 더욱더 그 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퇴근 후 장보기, 요리하기, 저녁식사, 그리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몽블랑이 보이는 공원에서 피크닉, 겨울에는 친구들 집에 초대하고 초대받아서 같이 저녁 먹기, 그게 아니면 집에서 할거 하면서 시간 보내기. 여기서의 삶은 이런 단순함이 주는 행복이 크다.

여름에는 레만 호수가 보이는 Parc de La Perle du Lac 에서 회사끝나고 친구들과 피크닉을 자주한다.
제네바의 랜드마크 - Jet d’eau. 저뒤에는 몽블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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