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울렁증,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내 인생에서의 영어
중학생 때까지는 별 의미 없었다. 그냥 학교 공부 과목 중 하나 정도?
지금은 어쩌다 보니 영어만 쓴다. 한국어는 엄마랑 동생한테 페이스타임 할 때.
영어 공부의 시작 - 20년 전, 그때 초등학교
초등학교 3학년 때서부터 의무교육으로 '영어'과목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력도 많이 안 좋고 지금 서른이 된 마당에 2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을 기억하려니 조금 자신이 안서지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전인 1학년, 2학년 때에는 약간 극성인 같은 반 애 엄마가 선생님이 되어 그룹 스터디를 하기 위해 동네 애들 몇몇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나는 거의 뭐 놀러 가는 식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그때 처음 영어 공부와 신문 공부인 NIE를 시작했다.
초등 3학년 이후로는 윤선생 영어를 시작했는데 나와 동생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사투리를 쓰는, 엄청 깐깐하고 지랄 맞은 선생님이라, 일주일에 한 번인가 두 번 만나는 시간이 정말 고통스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더군다가 학교 가기 전 그 선생님에게 받는 모닝콜 전화는 정말이지 완벽한 지옥이었다. 잠도 깨기 전에 엄마의 호통에 눈 비비고 책을 찾고 전화기 앞까지 전력 질주해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일상이라니.. 끔찍하다. 한편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공부를 안 했기에 싫어했을 경우수가 더 크지만.
영어에 흥미를 느끼다. - 사이판 한 달 살이
인과관계가 확실한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영어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
중3 여름방학.
잠깐 잊고 살았는데 내가 이 당시에 성악 공부를 했었더란다. 같이 노래하는 언니들, 선생님, 내 동생과 함께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달 살이를 하러 사이판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영어 학교를 2-3주인가 다니면서 영어를 공부했고, 동네의 원주민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바디랭귀지를 썼었다. 원주민 아이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었지만 자신감이 없어서 정작 대화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때 정말 영어를 정말 못했다. 아예 생짜 모르는 건 아닌데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같이 간 언니들이랑 나랑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영어 걸음마 단계였는데, 그중 캐나다에서 살다온 언니가 하나 있었다. 자유자재로 자신감 있게 영어를 구사하는 언니를 보고 나는 부러웠다.
학교에 간 월요일 아침. 주말에 뭐했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새섬(Bird Island)에 다녀왔다는 어느 한 오빠. 아일랜드를 "이슬랜드"라고 발음하는 걸 보고 속으로 엄청 비웃었다. "아일랜드 정도는 기본 단어 아닌가? 얼마나 공부를 못했던 거야, S가 묵음인 거 정도는 껌인데.." 정작 나 자신이 영어로 한 마디를 내뱉으려면 수십 번의 문법 확인, 단어 짜깁기의 두뇌회전이 돌아가서 영어 울렁증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남을 비웃었더란다.
영어 슬럼프
고등학교 때 영어과목이 제일 재밌었고 자신 있었다. 영어 선생님 중 한 명이 정말 잘 가르치셨는데 이 선생님의 수업을 계기로 영어 선생님의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영어가 재밌어졌다. 재밌어하니 결과도 좋았다. 모의고사 결과 중 가장 못했을 때가 3등급이었고 대부분 1등급을 받았으며 만점도 두 번 받았었다. (대학 동기들은 [똑똑한 애들이 많아서] 1등급이 뭐가 그렇게 대수냐 생각하겠지만.. 내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서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것이었음.) 중학교 때는 너무 어렵고 이해가 가지 않던 문법이 어떻게 고등학교 와서 재밌어졌는지는 의문이지만, 문제들을 풀면 풀수록 재밌었다. 뭔가 수수께끼 같고 퍼즐을 풀어가는 느낌이었달까.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니 영어가 제일 무서워졌다.
그렇게 자신 있었던 영어, 대학 1학년 때 교양필수였던 영어 1에서 보기 좋게 C+을 받았다. 첫 성적표에 씨를 남기는 건 용납이 안되어 재수강을 하려는 생각으로 교수에게 C-로 내려달라고 했다.(C- 아래서부터만 재수강이 가능) 그리고 재수강을 했고 재수강에서 최고점인 B+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 과목인 영어 2에서 또 C+을 받아버렸다. 사실 수업을 들으면서도 나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쎼고 쏐고, 외국에서 살다가 특별전형으로 서강대에 들어온 아이들도 많았는지라 내가 잘한다고 믿고 있었던 영어는 기본도 안 되는 기본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 마디 하려면 수백 번을 되뇌거나 아예 통째로 문장을 외워서 내뱉어야 하는 반면, 다른 학생들은 너무나도 쉽게 쉽게 영어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영문학을 복수전공으로 신청하고 교직이수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1학기, 2학기 동안 영어에 큰 충격을 받아버렸고, 지레 겁을 먹은 지라 영문학을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결국 2학년 1학기에 실행된 교직 신청은 단일 전공인 종교학으로만 신청했다.
영어만 쓰는 현재
호주 멜버른에 돌아온 후로 한국어를 쓸 빈도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동생이 멜버른에 살고 있을 때와 같이 일하던 한국인 제이 언니가 있었을 때에는 그나마 좀 썼는데 그들이 모두 멜버른을 떠나버렸다. 현재는 한국인도 주위에 없고 일하는 동료들과도 영어, 닉이랑도 영어만 쓰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bilingual이 아닌 byelingual이 되어간다.
지금은 하도 영어를 쓰다 보니 (그리고 한국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음) 영어가 더 편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직장 얘기를 한다거나, 호주만의 무언가를 설명할 때, 영어 단어를 영어로 배웠을 때 가끔씩 한국말로 번역하기 어려워질 때가 있다. - 이때까지 내가 아는 대부분의 영어 단어는 한국어로 배운 것이지만, 호주의 일생생활에서 새로운 영어 단어를 영어로 배우는 경우(영어를 한국어로 디코딩하고 다시 영어로 인코딩해 암기하는 것이 아닌)가 꽤 생긴다. 작년에 한국에 놀러 갔을 때 몇몇 사람들이 왜 이렇게 한국말을 이상하게 하냐고 했는데 정말 BYE-lingual이 되어가나 보다.
영어 슬럼프에 빠져있던 대학 초기 시절부터 그걸 극복해서 영어가 편해진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 글에 담지 않았다. 다음 편에 좀 더 자세하게 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