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을 그려드립니다

나에게로 가는 종점

by meldliy

나의 이상향은 조금 유별나다. 내 이상향 속 장면들엔 늘 약간의 어긋남이 묻어있다. 함께 ‘살아가기’ 보단 혼자 ‘살아남기’를 택하고, 가지고 싶은 걸 몽땅 가지기 보단 가진 것을 진창 없애는 쪽을 택한다. 살아가는 세상은 기댈 곳이 많아 나의 자리는 좁아지기 마련이니까. 최대한 웅크려서, 움츠려서 자리를 지켜내야 하니까. 살아남는 세상은 다르다. 넓은 자리가 어딘가 텅 비어 보이고 어딘가 쓸쓸해 보이긴 해도, 어깨를 활짝 필 수가 있다. 살아남는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짊어진 수백개의 짐을 펼쳐 올려두어도 충분하게 남아나는 고정석을 가질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가진 것이 진창 없을 때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내가 된다. 가진 것이 없는 만큼, 절박함이 생기니까.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은 소유가 물욕이 될 때 흘러가니까.


그래서 나는 종종 비워진 상태를 상상한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발걸음. 이상향이란 어쩌면 무엇을 더 얻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아도 무너지지 않는 자리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향은 늘 그 반대편에서 나를 시험한다.


이상향 반대편에 서있을 때의 나는 시간을 걷지 못해 늘 달리면서 모든 걸 쏟아냈다. 그 쏟아냄이 절망을 향한 자발적인 울부짖음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채. 그러나 절망은 곧 안심이 된다. 달아나는 나의 시간과 평행하지만 뿌리를 내릴 줄 안다는 점에서 완전하게 수직적인 시간. 그 시간 속에 변함없이 그대로인 누군가에 의해 그가 서있는 시간 속으로 다시 갈 수 있게 된다. 절망은 새로운 시작이 된다.


바르지 않아도, 못나도, 날이 서도, 이상향은 이상향이다. 보편적인 올바름은 늘 반대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급되어야 한다. ‘지금까진 이런 사람이었어. 근데 이제부턴 아니거든. 이제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야.’ ‘이제부터’라는 말은 결코 소용없는 말이다. 소급효가 인정되는 때에야 비로소 이상향에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닿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이상향의 모양을 잘못 흉내 낼 때도 있다. 책 읽기. 글쓰기. 건강한 음식 먹기. 긍정적으로 살기 ... 이상향을 위한 신념은 늘 이러하니까. 진짜 신념을 모방하려는 이에게 가짜 신념이 물들면, 진짜 신념은 너무나 쉽게 자랑거리로 변모한다는 문제가 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온갖 보정을 두르고 있는 자랑거리. 그리고 무심한 듯 끈질기게 따라오는 꽁무니 한 줄.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ㅎㅎ.’


신념은 원래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몸에 남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듣는 이가 생기고, 알아채려 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느끼는 변화가 있다. 이상향은 그런 식으로 조금씩 닮아간다.


같은 길을 걸어도 저마다의 종점은 다 다르다. 걸음의 무게도, 속도도, 눈동자의 명도도, 마음의 채도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색을 몰라 늘 흑백이던 이의 종점은 흑백의 자신이라는 것. 걸었던 길을 되돌아가는게 아니라, 처음 걷는 길 끝에 똑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나에게로 ‘처음’ 걸어가는 길이다. 그렇기에 이상향이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오래 걸어온 끝에 결국 나와 닮아 있는 나에게로 다시 도착하는 일이다.


이상향을 그려드립니다.

유명한 화가는 아닙니다.

능력이 다하는 날까지,

사색에 잠기기 직전의 그날까지,

낯선 나라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그림 한 점이

제가 그린 그림의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제게 맡겨주시겠어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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