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같은 사랑 없이도 남아있는 것들
제 쓸모를 잃어도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어떤 편지는 받는 사람 없이도 쓰여지니까요. 어떤 진심은 사랑 없이도 전해지니까요. 처음 같은 사랑 없이도 남아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열심히 사랑했던 처음의 떨림이 그리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무너져버릴까봐 붙잡아 두었던 나와의 어린 약속들이 그리운 것인지. 이유 모를 눈물이 납니다.
사랑은 처음의 모습으로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처음의 떨림은 서서히 가라앉고 설렘은 조용히 익숙함 속으로 스며들어요. 무엇인가 잃어버린 기분이 드는 건, 아주 잠깐일 뿐이에요. 길을 잃어도 발걸음이 닿는 그곳이 누군가에겐 도착지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더 이상 발걸음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래요.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발걸음이 결국 어떤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다 놓아요.
낡은 사랑에게 완벽한 끝이란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재밌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허무하지도 않은 목적지를 향해서 늘 걸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미지근하게 일렁이는 작은 호수가 낡은 사랑이 머무는 곳인가 봅니다. 연약할만큼 부드럽지만 쉽게 부서지는 법을 모릅니다. 넘칠만큼 가득하지만 쉽게 넘쳐나는 법도 모르고요. 처음의 사랑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부서지지만, 낡은 사랑은 호수처럼 머뭅니다. 크게 흔들리지도, 요란하게 빛나지도 않지만 그 물결은 오래 사라지지 않아요.
오늘도 처음 같은 사랑 없이도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에 잠기다 잠에 듭니다. 잠긴 생각을 뒤로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조각들은 대개 이렇습니다.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수첩에 빼곡히 적어놓았던 책 속 문장들. 언젠가 다시 펼쳐볼 날을 기약하며 매일 밤 아프게 써내려갔던 일기장. 나무 뒤에 숨은 벤치에 앉아서 아무도 모르게 행복을 누리던 날의 기억. 그런 우리를 아무도 볼 수 없을거란 착각 속에서 피어나는 장난기 어린 의심.
그 벤치 위에는, 너무도 당당히 의심을 즐기던 우리가 여전히 앉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