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사랑으로
덜어내자.
꾸밈없이. 간결하게. 멋없게. 볼품없게.
그럼에도,
깊게. 진솔하게. 고유하게.
진심을 꾸미는 것만큼 멋있는 일이 없지만 되려 멋없음을 추구할 때 진심은 내 것이 된다. 달콤한 유혹을 뿌리친 승리자의 웃음 같은 것. 보이고 싶지 않은 걸 보일 때의 창피함을 모른 체 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 창피함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은 곧장 낯간지러움이 되어 한번 더 바라보고픈 수줍은 소녀가 되고 만다.
소녀는 날 것으로의 여정을 떠난다. 닳아가는 연필심에 글자를 붙잡아둔다. 글자는 소녀만 아는 수수께끼가 될 때, 비로소 소녀의 것이 된다. 정착할 줄을 알게 된 소녀의 시선은 불완전함을 좇는다. 불안에서 벗어나 불완전을 좇는 일.
진정, 소녀의 구원은 소녀였다.
완전하고 싶어서 늘 태양을 등졌다.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볼 용기만큼이나 대단한 무모함이 없는데. 깨끗이 개워진 등 뒤의 마음보다 눈앞의 그늘만을 볼 줄 알았다. 태양 앞에서 손전등은 우습기만 했으나, 소녀는 막연한 그늘에서 망가진 손전등을 들고 그렇게 헤매었다.
시작이 반복되면 어느새 끝을 바라고 있는 이기적인 마음이 싫었다. 사랑을 오랜 시간 향유하는 법은 시작하지 않았을 때 가능한 것은 아닐지. 그래서 지독하게 나를 들여다보기보단 차라리 허공을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보편적임을 버려내지 못하고 끝없이 완전한 끝을 향하고 있는 두 눈을 도저히 내 의지로는 마주할 수가 없었다.
힘겹게 사랑의 향유를 시작한 듯 했지만 소녀는 배우가 되었다. 표정을 고르고 마음을 연기하기 위해 대사를 고쳤다. 사랑이라는 관객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배우는 조금 더 괜찮은 배우가 되고 싶어진다. 괜찮은 연기. 다정한 연기. 때로는 단단한 연기. 그 모든 연기는 관객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제 안다. 관객이 오래 머무르는 곳은 완전한 장면이 아니라는 것을. 대사가 조금 어긋나고, 진심 아닌 연기가 조금 들키고, 숨기려던 서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 사랑이라는 관객은 오히려 그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을.
소녀는 다시 연필을 쥔다. 조금 닳은 연필심으로. 조금 삐뚤어진 문장으로. 잘 쓰인 문장이 아니라 잘 숨기지 못한 마음을 적기 위해서. 볼품없어지는 연습을 한다. 분명 멋있어지는 연습보다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 사랑은 그늘 아래서도 숙성되기 마련이다. 더 이상 그늘 속을 더듬지 않는다.
소녀는 망가진 손전등의 스위치를 끈다.
딸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