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터 7까지

저 공간으로의 피신

by meldliy

언제 생겼는지 모를 버릇이 있다. 쓰는 동시에 읽는 버릇. 난 그게 좋았다. 그래야 진짜 쓰는 것 같고, 진짜 읽는 것 같았다. 연필 끝에서, 눈동자 끝에서 진짜 살아 숨 쉬는 기분이랄까. 허공에 글을 날리지 않으려는 버릇. 쓰면서도 지독하게 손끝에 잡아두는 일. 그게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글자를 종이 위에 새기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이름 모를 누군가의 조각을 머리에 새겨서 나의 묵은 생각들을 재배치하려는 일이다.


사람의 눈은 태어나기를 상대적인지라 얼마든지 아름다운 것을 못생기게 바라볼 수도, 보잘것없는 것을 귀중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 사실이 간혹 서늘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맘에 들지 않는 문장이 돌아 돌아 다시 보면 마음에 쏙 들만큼 반짝이고 있을까 봐. 맘에 드는 문장이 돌아 돌아 다시 보면 도저히 온점으로는 끝마칠 수 없는 가느다란 블랙홀이 되어있을까 봐.


사실 그 서늘함은 내 공간에서만 허락되는 특권이다. 내 공간에서의 또 다른 특권이라면, 누워있는 낙엽의 바삭거림은 기대조차 않은 채 조심히 피해 갈 특권. 동네의 친숙한 소음을 듣기 위해 듣고 있던 음악을 끌 특권. 나뭇가지에 가려진 신호등이 어쩐지 더 선명해 보여서 두 번 바라보지 않아도 될 특권. 모든 이가 떨어져 걷지만 잠시나마 가족이 될 수 있는 특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걸음은 유일하게 허용되지 않을 특권. 여유는 산책의 기본 값이라지만, 도서관으로 향하는 산책은 왜 늘 달려가는 조바심을 닮아있는지.


내 공간엔 도망치듯 날아가는 참새는 없다. 놀랐지만 도망은 가지 않는 참새 앞에서 더 힘껏 놀라 주춤하는 아이뿐. 완벽에 가까웠던 탄생 하나가 뒤늦게 불행해진 후론 입을 닫아버린 아이뿐. 완벽의 탄생과 불행의 탄생. 불행이 먼저 태어나고 완벽이 뒤늦게 태어났어도, 순서가 바뀌었어도, 불행은 불행인 걸까. 어차피 태어날 거였음 진작 태어났어야 조금 덜 아팠을까.


스물 0살. 어리진 않지만 한참 어리석을 나이.

“적어도 제 공간에서만큼은 어리석음을 벗어나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그러나 공간의 반경은 A4용지 한 장을 반으로, 또 반으로, 반의 반의 반으로 접어 점보다 더 작은 점이 된 딱 그 정도.


젠장.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나의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피신한다. 저 공간으로의 입성만으로는 불편하리만큼 찐득하게 묻어있는 마음의 의식들을 단숨에 해결하지 못한다. 새하얀 이불속에 이 공간을 밟던 이따금의 두 발을 숨겨야 하고 엉덩이는 늘 어깨보다 늘어지게 앞서야 하며 무릎은 늘 머리보다 우뚝 솟아야 한다. 최적의 조각상이 된 나는 베개 밑에 깔린 책을 펴고 수첩 사이에 검은 연필을 낀다. 드디어 제대로 피신한 기분이다.


그리곤 방향 잃은 흥분의 향연이다.


1내 영혼의 역사를 상상한다.

10분에 한 번씩, 1시간에 한 번씩.

대충 존재해도 각광을 받는 나만의 역사를.


2버킷리스트를 쓴다.

시작도 끝도 아닌 지점에서.

3월의 어느 애매한 중간 지점에서.

덩그러니. 뜬금없게.


3플레이리스트를 수정한다.

노래가 태도를 결정한다는 기분이

어느 구절에 나를 가둔다.

멍을 때리다가도, 잠에서 깬 직후에도.


4우정과 사랑을 비교한다.

어쩐지 H가 생각난다.

주춤거리는 돌멩이 앞에서 선뜻 용기를 내어준 H.

그녀는 바위였다.


5항공권을 알아본다.

이내 착잡해한다.


6어느 페이지는 읽기를 잠시 멈추고 글자 사이의 빈 곳을 직시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거란 예언을 풍기는 능력을 가졌다. 신조차 모를 그 능력을 작은 휴대폰의 작은 네모의 또 하나의 작은 네모에 숨겨두려 뻗은 창피한 팔을, 도로 접는다. 대신 수첩을 편다. 이 능력만큼은 내 손끝에, 내 번진 연필심에, 내 가난한 직선 위에 숨겨야 했다. 살에 손톱이 찍혀도, 남발하는 빈 공간 때문에 울상 지을 나무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파도, 괜찮았다. 포부를 뛰어넘은 것이었으니까.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피신 전의 도발적인 생각을 후회하며 능력을 숨긴다. 도망칠 궁리만 했던 잠깐의 도발이, 한 여자와 한 남자에겐 평생의 굳은살로 남는단 걸 뒤늦게 깨닫고.

숨겨둔 능력의 끝을 살짝 접어둘까 고민도 한다. 하지만 금세 그러지 않기로 한다. 숨기지 못한 다른 능력들과 차별을 두고 싶지 않았기에. 먼 미래 어느 날의 우연이, 이 능력의 장면을 두 눈에 꾹 꾹 담아두고 싶게 만들었으면 했기에. 아마도 그 우연은 변한 것 없이 못난 내가 다시 숨어있는 곳일 테고.


그리고, 7.

5의 흥분을 후회하고 2의 흥분을 재개하며 수첩을 닫는다.




‘엄마와 꼭 파리에 가기.

그녀에게 밤의 에펠탑을 꼭 보여주기.

창틀에 앉아 넋을 놓은 그녀를 꼭 두 눈에 담기.’






기분 좋은 밤이다.

한 손엔 포크를, 한 손엔 나이프를 쥔 상상을 한다.

치즈는 포크에게 들키고도

어쩐지 나이프에만 늘어나 감싸질 줄 안다.


꿈을 꾼다.

막힌 길에서 어린이는 인도로,

어른은 도로로 걸어야 한단다.

귀여운 차별이다.

찌푸려지지 않는 미간 덕에

찰나의 안심과 미소가 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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