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우리 생애 기본 주기도 슬금슬금 위로 올라가고 있다.
19년 전, 이민 와서 매일이 전쟁이었던 어떤 날, 들었다. 우리 한국에서 '여류'라고 이름 붙은 분들의 얘기인데, 내 나이보다는 한세대가 앞선 이들이었다. 대체로 자신들의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분들이 인생길 최고의 시간대를 50대로 꼽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마흔의 한중간으로 가던 길목에서 다시 출발점에 섰던, 이민살이가 적막강산, 절해고도였던 그 시절이었기에 그 얘기가 마음속에 작은 위로 비슷한 것을 주었다. 빨리 50이 되었으면 좋겠네, 시간의 주인께서 나를 어디론가 옮겨 놓으실 텐데, 그래 몇 년만 더 버텨보자, 안 버티고 어쩌랴만, 강물에서는 헤엄을 치든지 가라앉든지, 이거는 선택도 아니었다. 기냥 ...
그러구러 저러구러 50이 되었는데 막상 별 무소식, 약간 덜 바빠지긴 했다. 아주 쪼끔...
9년 전인가, 60살 축하 파티에 갔다. 변호사로, 몇 회사의 회장이었던 말그대로 성공했던 주인공에게 덕담이랍시고 한마디 했다. 한국 사람들은 인생은 60부터 시작한다고, 주위가 시끄러웠고 내 발음도 자신이 없었기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음에도 '암튼 좋다는 뜻이지?' 하고 대답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이들어 가는데 뭐가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었을까 싶다만. 그러고 보니 성공한 남자들에게는 인생 최고의 때, 등의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남편의 50대도 나와 다를 수는 없었고, 그 전쟁 끝에 당도했던 남편의 60살, 인생은 지금부터라는데 이제부터 앞에 단위 빼버리고 시작하는 맘으로 살자고.
내 나이 50이 되어도 인생 최고의 때는 그림자도 안 보이고 60을 향해 가던 어느 날, 글 한 꼭지가 나를 약 올렸다. 나이 60에는 새로운 기적이 시작하는 때라고. 아니 뭔 뜬금없는 상향조정? 50대의 강줄기가 거세기만 한데, 한참을 지나서야 새로운 기적이 올 것이라고? 새로운 기적이 온다면 헌 기적이라도 있어야 말이 되는데 당최 보이질 않네. 인생 최고 시간대의 나이에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 시작한 내게 또 다른 글 한 꼭지가 들어왔다.
전 세계인 대상의 삶의 만족도 연구에서 가리키는 최고의 시기는 70대라고 하질 않는가. 아니, 나 더러 어쩌라고 자꾸 미뤄지나, 희망고문이 따로 없네 등등... 하면서도 말은 된다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친구 몇몇과 한참 얘기 끝에 다들 동의했다. 이 결과는 복지국가 부자 노인들만이 아니라 최빈국 노인들 또한 같은 결과를 보인다는 것에. 양극단의 계층이라면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나이듦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평등을 갖다 준다고.
존경하는 작가 김 훈 선생이 쓴 글에 '세월의 풍화 작용'이라는 말이 있다. 아니 이 글을 참 좋아한다. 인생이란 시간과 삶, 세월에게 풍화되지 않을 것이 무엇이랴. 당장 그리고 영원히 죽어 없어질 것 같았어도 살아 남고,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음에도 없어진 그 징한 희로애락의 세계가 아니던가.
온갖 담론의 한가운데서, 내일은 너무 멀리 있고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지만 오늘 바로 이 순간이다, 라는 모범답안은 재미가 없다. 이럴 때 소환되는 한마디가 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다. 대단히 성공한, 자신의 분야에서 압도적 선두주자들의 자주 내놓는 일성이다. 이런 분들이 인류 발전과 진보의 상징이 되고는 한다. 안주하지 않고, 겸손히, 쉬지 않고 도전하겠다는, 끝없이 뛰어가겠다는 인간의 의지이건만 이는 생각만으로도 피로감이 달려든다.
나의 20대는 까칠한 실존주의자 시몬 보브와르 여사가 말했던 '날마다 행복이 밀려오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에 열광하고 매료되었던 철부지였다. 그 시절이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음에 언제나 감사한다. 가끔은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까바 무섭기조차 하다.
80대인 제레미아 다이아몬드 교수가 종전의 결과를 확인해 주었다. 그에게도 인생의 최고의 때는 70 때였다고 한다. 이처럼 다른 시대와 세대의 분들이 얘기하는 최고의 시절은 지나 봐야 아는 것이라는 공통점 하나는 있으니 이 또한 씁쓸하다. 신통찮은 나의 50대와 60이 들어서도 새로운 기적은 구경도 못했지만, 나 또한 시간이 지나서야 말할 수 있으리라.
달콤쌉쌀한 것은 이렇게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거의 10년 주기로 인생 최고의 때가 십 년씩 상향조정이 되고 있으니 몇 년만 더 있으면 80대를 최고의 때라고 하지 않으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