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4월 말쯤이었던 것 같다.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깨었는데 바깥이 너무 환했다. 아닌 봄에 눈이라도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혹시해서 나갔더니 우물 옆 큰 매실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에 하얀 달빛이 부서져서 온 세상이 하옜다.
이 나무에서 5월 말쯤 되니까 연초록의 열매가 맺혔는데 어쩜 그리도 예쁘던지.... 그때 내가 뭘 알았을까만 그 열매로 술을 담근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다음 해였던 것 같다. 그 예쁘고 향기로운 열매로 술만 담근다는 것이 아까웠다. 설탕에 재워보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으리란 마음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들은 금도 가고 짖이겨지도 해서 하나하나를 땄다. 나무가 큰데다 열매가 지천이라 아까울 것이 없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는 몰라도 노랗게 익기 전에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다리와 의자를 갖다 놓고 에지간히도 열심히 거뒀는데 흐르는 물에 씻어서 물기가 다 마르도록 햇볕에다 잠깐 말렸다. 엄마가 담그던 포도주는 설탕과 포도가 일대일의 비율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생각조차도 없이 매실이 잠기도록 설탕을 부어서 놔두었다. 설탕이 녹고 과육이 쪼글거리면서 거품도 나고 해서 분리해 주었다.
그러다가 여름이 왔는데 마침 교회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 해서 음료수로 그 매실청을 내었다. 나도 그렇고 우리 집도 그렇지만, 그 매실 진액을 양념으로 또는 물에 타서 매실 하나 동동 띄워 먹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벌써 몇 해째 만들어 왔기에 그대로 했을 뿐인데 교회 식구들이 다들 놀랐던 것 같다. 이후로는 해마다 자매들끼리 어찌어찌 알아봐서는 매실을 아주 가마니채로 사서는 매실청을 담근다고 야단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쯤부터 매실청이 상품화되어서 유통되기도 했다. 신기했던 것은 내가 매실청을 담기 전에는 그런 제품을 본 적도 없었기에 좀 궁금했다. 성장과정이 그리 빠른 나무는 아님에도 그동안 아무도 매실진액을 상품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고 갑자기 쏟아져서 나오는 그 진액들의 출처에 신뢰가 좀 떨어지곤 했다. 색깔이 까맣고 향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대량생산과 가정생산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했다.
매실나무의 봄, 꽃이 참 예쁘다. 꽃이 그리 많아도 별 향을 느낄 수가 없지만, 흰색에 가까운 분홍의 얇디얇은 꽃잎이 나무 전체를 덮는다. 화사하고 풍성함에는 벚꽃과는 다른 품격이 있고 좀 더 은은하다. 그 꽃잎이 봄바람에 쏟아져 내리면 꽃이 져서 예쁜 꽃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꽃이 진 자리에 자라는 연초록과 진초록의 중간 초록의 열매는 그냥은 먹을 수가 없지만 술을 담거나 진액을 만들면 향에서 놀라고 그 맛에서 놀란다. 설탕의 단맛을 헤치고, 그 씁쓸하고 떫은 듯한 뒷맛에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진액을 다 따라내고 열매 몇을 남겨 두었다가 같이 타서 먹으면 한번 정도는 더 우려먹을 수도 있었다.
언젠가 모교수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아니, 왜 그때 그걸로 사업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하길래 깜짝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쉽기도 하지만 누울 자리보고 발 뻗어야 하는 벱이다.
이민 와서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어디 한둘이랴만 봄이면 그 매실청의 추억도 한몫을 했다. 12년 동안 어디서도 매실나무라고는 구경도 못했는데, 6년 전에 이사를 왔더니 옆집의 담장을 넘어서 절반이 우리 집으로 뻗어있는 매실나무가 있었다. 처음에는 믿기가 어려웠는데 한 해가 지나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걸 보고서야 매실청을 기대가 생겼다. 나무 크기에 비하면 열매가 부실했는데 작년에는 이웃집에서 가지치기를 심하게 했다. 저러다 나무가 다칠까 걱정을 하면서도 은근히 올해 여름을 기다렸다. 이웃집 나무를 보면서 속셈이 훤히 보이는 눈독을 들였던 게다.
이곳의 일본인들 중에는 농장에서 직접 키워 열매를 파는 사람도 있다. 가격이 만만하지않지만 교민중에도 사다가 청을 담는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매실 즉 우매는 최고의 밑반찬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보다 활용도가 높은건 사실이다.
올봄에도 어김없이 꽃손님이 우리 뒷마당에 하얀 눈꽃을 내렸다. 꽃이 지고 몽글몽글 맺히는 열매들이 가지마다 가득이었다. 올해는 작황이 좋겠다고 내심 날마다 쳐다보고 있는데 10월에는 야속한 바람이 어찌나 불든지 아직 영글지도 못한 녀석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11월이 되며 이제는 어지간히 형태를 갖추어 가는데 또 야속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대었다. 그 바람끝에는 뒷마당에 한줌정도의 매실이 떨어져 있곤 했다. 그래도 형태를 어지간히 갖추었으니 주웠다. 바람에 떨어진 것이라서 금도 가고 상처도 있지만 한가하게 모양 예쁜 걸 찾을 상황이 아니질 않는가.
그나마 제대로 자란 녀석들만 골라서 설탕을 부어서 놔두었더니 쪼글쪼글해지면서 매실청이 나오길 시작했다. 설탕 잘 녹으라고 한 번씩 섞어주었다가 시럽과 열매를 분리했다.
병을 끓인 물에 중탕 소독을 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일이 성가셔서 빈 포도주병에다 담아둔다. 냉장 보관하면 한해살이 양념도 되고 음료도 된다.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뉴질랜드의 좋은 기후 덕에 토종 한국산 하고는 쓴맛에서 현저히 떨어진다.
12월이 오면서 남편과 함께 나무를 털어서 진짜 수확을 했다. 봄의 모진 바람을 이기고 살아남은 녀석들은 양도 그렇지만 실과도 굵고 단단하다. 사다리를 놓고서 일일이 땄다. 설탕에 재웠다가 오늘 다 걸러냈다. 포도주병 다섯 개가 거뜬히 찼다. 올해 참 풍성하다.
보통은 이런걸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남편이 한병 달라길래 살짝 째려봤다. 사돈댁과 절친에게 한병 줬는데 너무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