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설공주 Nov 25. 2021

우리 아부지

양배추 껍데기와 압력솥

 얼마 전까지 만해도 나는 누구 하고도 아부지 흉을 보던 못된 딸년이었다. 그 누구에는 어쩌다가 아부지 얘기가 시작되면 언제라도... 였다.


양반, 속칭 건강 염려증이 있었던 것 같다. 한 말씀 들었으면 꼭 해봐야 하는 분이셨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수많은 ‘썰’들을 다 수발해야 했던 우리 옴마, 한참 때는 사람들이 집에 오는 것이 무서웠다고 하셨다.

이런 얘기들을 다 옮기려면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도 삼아도 부족할 터이지만, 기중에도 잊히지 않는 것은 '양배추 껍데기'건이다. 새벽예배를 다녀오신 두 분이 한번 크게 야단이 났는데  또 어디선가 날아다니던 '몸에 좋다 카더라'는 카더라 통신 탓이었다.


부산의 부전교회에서 걸어서 5분이면 부전시장이라는 전통시장이 있다. 그때만 해도 부산에서는 제일 큰 재래시장이었는데 겨울 아침에 가면 참 볼만했다. 새벽예배가 마친 다섯 시에서 여섯 시사이에는, 지금도 그렇겠지만, 가게 상인들이 다듬어 놓은 양배추의 겉껍질이 수북했다.  즉 그 쓰레기를 커다란 푸대에 꽉꽉 눌러 밞아서 지고 오신 것이 그 사단의 시작이었다. 버스도 타지 않고, 어른 걸음으로 30분은 족할 그 거리를,  우리 아부지 열심이셨고, 한다면 하는 분이셨다. 그 상인들이 보기에도 이상했을 일이었지만 그날만은 엄마가 폭발을 하셨다. 요즘은 쌀이 소포장이라서 그런 푸대 자루를 보기도 쉽지 않은데 그때는 못해도 30킬로 들이는 되었을 법한 푸대에서 쏟아져 나온 양배추 껍데기가 좁은 마당을 꽉 채웠다. 때늦은 걱정인데 자식들에게 험한 일을 시키지 않으셨던 우리 엄마의 성정이었기에 맘이 쓰인다. 제발 그 쓰레기들을 아부지가 다 치우셨기를 바래본다. 어떤 지청구에도 모르쇠였던 아부지였지만 그 사건 이후로 양배추 겉껍데기 타령은 없으셨다.


우리 아부지하면 떠오르는 사건이고 엄마 생각을 하면 지금도 화가 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딸의 감정인가 보다. 한 다리가 천리라고, 이런 껀도 한 다리만 넘어서면 다른 반응이 나온다. 막 결혼한 새언니한테 그 얘길 했더니 아주 깔깔대며 웃었다. 어찌 시작된 얘기이든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덕분에 잠깐은 나마저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을 정도였는데 이거는 예고편이다. 작은 오빠 즉 자기 신랑한테 그 얘길 했더니 ‘우리 아부지한테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고 하더라면서, 오빠는 놀라지도 웃지도 않더라면서도 여전히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친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우리 (시) 어머니의 반응 또한 달랐다.

당신 스스로 잘 챙기시니 얼마나 좋으냐며 그러니 건강하시지 않느냐며 남편이신 (시) 아버님 걱정을 이으셨다. 그리보면 아흔셋으로 백수를 누리신 우리 아부지는 마지막까지도 참 팔팔하게 사셨다. 그때만 해도 그런 반응이 마뜩찮았던 며느리는 속으로 고시랑거렸다.


  ‘옴마 마마, 직접 안 겪으셔서 그러십니다요.’라고


큰언니의 진단에 따르면, 아부지가 그토록 몸에 좋다는 것에 매달리셨던 데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중년의 초입에 건강을 잃고 십 년 고생하신 것이 그 원인일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는 머리로만 수긍했는데, 우리 아부지 스스로 잘 챙기신 덕에 우리가 고생 덜했나 하는 맘도 때로는 든다.


우리 아부지의 실험이 죄다 실패작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게 성공작이 있는데 기중 현미밥이 있다. 그 양반 덕에 30년도 더 전에 알게 된 고마운 건이다. 또 어디선가 현미밥이 좋다 하는 것하고 그 쌀은 압력솥으로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셨다. 그때만 해도 현미쌀 파는 곳이 별로 없었고 풍년 압력솥이라는 압력솥은 생전 처음 본 물건이었다. 마침 막내의 친구가 경상남도 곤양의 농사꾼 집안 출신이었다. 그 집에서 주문받아 현미를 배달하던 터이라서 사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동생 친구의 반응이 웃프다. 저거가 주문받아서 배달하는 집이 부산에서도 최고 부촌 거기다가 기중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객이라는 말이었다. 동생 친구가 무슨 생각으로 했던 말인지 대충 속마음이 짚어져서 또 맘이 안 편했다. 암만 봐도 민숙이네 집이 그리 부자는커녕 가난해 보이는데 그 쌀을 찾는다는 것이 하 수상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현미쌀과 압력솥에 대한 반응이 그닥 나쁘지 않았다. 예상 밖의 반응에 고무가 되셨던지 뭐 색다른 사명감까지 가지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결혼해서 솔가 한 두 딸과 아들네에다 솥과 쌀을 다 사다주시고서는 밥을 짓는 방법까지 전수하셨다. 뭣도 모르고 먹었던 아니 먹어야 했던 현미밥이 이제는 맛있는 나이가 되었다. 누룽지를 삶아서 먹노라면 그 고소한 감칠맛에 맘속으로 투덜거리고 치치도외했던 것이 살짝 죄송하기도 하다.


세상에 둘도 없을 음치 셨음에도 어디서든 노래를 사양하지 않으셨다. 얼마나 음치셨든지 즐기시는 찬송가가 작년과 올해가, 일 절에서 사 절까지, 어제와 오늘이 다 다르게 부르셨을 정도였다. 무신경한 데다 남의 눈치 이런 것과는 담을 쌓고 사셔서 그런지 우리 아부지하고 못 지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부모와 다섯 동생의 맏이셨는데 조모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장모까지 즉 우리 외할매까지 같이 모시고 살았다. 이런 얘기를 하면 대개가 깜짝 놀란다. 아니 그 시절에, 어떻게...? 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부지 험담을 아무데서도 했던 딸년의 못된 버릇도 별 개의치 않으실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속칭 그 친화력이랄까 뭐 그런 것들이 참 부럽다. 아부지가 돌아가시고부터는 그 좋은 건 못 닮았다는 것이 쓰리고 에리곤 한다.


15.12.21

작가의 이전글 You와 아버님, 어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