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_05

태양 폭발

by melina

-기다렸어요, 현서 님.

헐레벌떡 집에 왔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수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현서에게 자랑스럽게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펼쳐 보였다.

-투명 망토 스킨! 1회에 단 돈 500만 원이에요.

수안은 혹여나 현서가 자신을 찾을까 싶어 회사에서 내내 투명 망토 스킨을 착용하고 쫓아다녔다고 했다.

“어휴 돈도 썩어난다.”

-현서 님 귀찮게 안 하려고 그러죠. 얼마나 기특해.

예측 불허의 서프라이즈에는 저항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여간 수안은 못 말리는 구석이 있었다. 어디부터 엿듣고 와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종종 거리며 현서를 몰래 쫓아다녔을 걸 상상하니 괜히 짠하기도 했다.

“데이터는 언제 또 다 정리해 놨어?”

기준 별로 깔끔하게 정제된 데이터 테이블을 보며 괜한 미안함에 아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차피 박영훈만 좋은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해올 걸 알았으면 괜히 맡겼나 싶었다.

-현서 님 그거, 그냥 박팀장인지 뭔지한테 넘겨 버리세요.

뜻밖의 말에 현서는 속마음을 들킨 것 마냥 놀랐다.

-누구든 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알아서 하게 두고 우리는 더 재밌는 거 해요. 더 멋진 거. 우리가 해야 하고, 우리만 할 수 있는 거.

순간 벙 찐 채 보게 된 것은, 아주 깊은 곳에 없는 듯 숨어있던 작은 기대 한 조각이었다. 이거였구나. 수안에게 떠넘기듯 업무를 맡겼던 건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싶어서였는지 몰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좁은 이야기에서 현서를 꺼내 함께 멀리 갈 사람을. 저 높이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 대신 저 멀리까지 함께 가보자. 수안이 내민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이제 정말 수안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마음이 한 배를 타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다. 하려던 말을 들어볼 테니 한 번 해보라는 말에 수안이 잔뜩 신이 나 스크린을 공유했다.

-이주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어요.

언제 준비한 건지 커다란 마인드맵을 스크린 가득 펼쳐놓고 수안이 설명을 이어갔다.

-먼저 불완전 이주. 원래의 몸과 뇌를 유지하면서 디지털 자아를 추가로 갖는 방식. 이 경우 마인드 업로드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원래의 자아가 온전히 존재한다는 이점이 있어요. 하지만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에 대한 정체성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어요.

“진짜 미래 세계 이야기 같네.”

수안이 집중하라며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두 번째는 휴면 이주. 자아를 디지털로 이주시킨 이후, 원래의 몸과 뇌를 동면 상태로 보존하는 방식이에요. 불완전 이주의 이점은 가져가면서 정체성 혼란 리스크를 제거한 거죠.

“수안 님은 어떻게 했어?”

화면이 옆으로 넘어가며 세 번째 페이지가 나타났다.

-저는 세 번째 완전 이주 방식이요. 업로드를 마친 후 원래의 몸을 제거했어요.

제거라고 함은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야? 현서가 의문을 제기하자 수안이 꽤나 여러 번 답해 본 문제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어차피 저는 목 밑으로 전신마비였거든요.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뚱이는 유지 비용만 많이 들어가는 레거시 같은 존재예요. 몸과 아바타에 계속 이중과금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런 몸을 천문학적인 유지 비용을 들여 보존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고 버린다고? ‘너’를?”

-제가 아니라 ‘몸’이요. 제가 쓸 수 없는 몸을 버리는 것과 파상풍 환자가 팔이 곪아서 절단하는 게 뭐가 다르죠?

수안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논리적으로는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논리 말고도 많은 게 있다. 예를 들어서 관습이나 정도 같은 것. 그걸 줄줄이 설명하려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수안이 선택한 일이고 현서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태양 폭발이 일어난다는 근거가 뭐야?”

-이래 봬도 제가 태양물리학 전공 수석이라구요.

이 와중에 자기 자랑은 빼먹질 않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태양은 원래 불안정해요. 수도 없이 폭발하고 있죠. 그 폭발은 온갖 물질을 우주 공간으로 뿜어내고, 이게 지구까지도 엄청난 영향을 끼쳐요.

수안은 설명하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 듯 약간 흥분 상태로 말을 이어갔다.

-특히 확률적으로 11년마다 큰 폭발이 일어나요. 2003년 할로윈 태양 폭풍은 스웨덴의 전력망을 붕괴시켜 역사상 가장 넓은 범위의 대규모 정전을 일으켰어요. 14년에는 태양의 AR2158 지점에서 폭발이 발생했지만 다행히 방출 방향이 비껴가 지구를 타격하지는 않았어요.

“호들갑 떤 거 치고는 별일 없었네.”

-NASA 같은 기관들이 계속 태양 활동을 관찰하고 전력망 보호를 위해 변압기를 보호하기 위한 지표 유도전류 차단 장치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뒀으니까요.

그럼 문제가 없는 거 아니야?라고 의문을 제기하려던 차에 지난 대규모 위성 추락 사건이 떠올랐다. 꽤 오래전 일이었지만 추락한 위성의 잔해가 어디로 떨어질지 예측하는 기사로 전 세계가 소란스럽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리고 25년 태양폭발에는 수 십 개의 위성이 영구적으로 파괴되었죠. 그로 인해 GPS 신호가 교란되어 각종 항공, 해상 사고가 일어났어요. 그만큼 위성은 태양폭발에 대비가 전혀 안되어 있어요. 그리고 저희 데이터센터는 아시다시피⋯,


“위성에 있지.”


칠흑 같은 우주에 작은 초파리 떼처럼 줄 지어있는 위성센터의 이미지가 떠올라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젠의 반쪽이 있는 위성센터는 애초에 젠의 성능만을 위해 지어진 게 아니었던가. 수안도 거기에 업로드되어있는지도 몰랐다.

-177년 전 캐링턴 이벤트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태양 폭풍이었어요. 당시 주요 통신 수단이던 전신 네트워크가 파괴되거나 오작동되었고 열대지방에서도 오로라가 보일 정도로 강력했어요.

수안이 어디선가 오래된 신문 자료조각들을 꺼내와 펼쳤다. ‘The Great Solar Storm’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가득했다. 일러스트에는 전선에 불꽃이 튀고 전신주가 무너져내리는 도시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었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오로라로 얼룩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문제는 이와 비교도 안될 크기의 태양폭풍이 지금 예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유튜브에서 얼핏 본 기억이 났다. 처음 겪는 강력한 태양 폭풍에 종말의 공포가 번지고 온갖 신흥 종교들이 생겨나 집단 자살까지 발생했다고 했다. 그나마 1800년 대였기에 온갖 전산 시스템이 대책 없이 마비되는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이주 이후 태양 폭발의 패턴을 더 상세히 연구했어요. 그래서 두 가지의 패턴을 발견했죠. 잘 알려진 11년 주기와 역사적으로 증명된 적이 없는 177년 대폭발 주기. 올해는 이 두 패턴이 겹치는 해예요. 캐링턴 이벤트보다 수십 배 강력할 걸로 예측돼요.

수안이 온갖 계산식과 그래프를 늘어놓았지만, 현서의 눈엔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쨌든 수안이 수도 없이 계산해 봤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이거 베레시트 측에 이야기는 해봤어? 이렇게 심각한 문제라면 그냥 무시하지는 못할 텐데.”

-그러니까요!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제 얘기를 안 들어줘요. 정확히는 아예 접근이 안되게 차단되어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이상했다. 수안을 베타테스터로 이주시켰다면 안정성을 살펴보려는 의도였을텐데, 운영진이 수안의 피드백을 듣지 않는 건 말이 안 됐다. 대체 이 숨겨진 프로젝트의 운영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그럴 거면 베타 테스트를 진행할 이유가 전혀 없다.

-특정한 사건이 있던 건 아니지만, 여러 번 기시감이 들었어요. 분명 심사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주할 거고 이주민들을 위한 별도의 데이터 센터도 준비된 단계라고 했는데, 어디에도 모집 공고가 보이질 않아요.

“잠깐, 심사라고?”

-네. 베타테스터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이주 적격 검사와 수차례 면접을 봤어요.

로어는 각계 각국의 멤버들이 일하는 히스토리를 잘 보존하는 게 중요해 그만큼 문서 작업이 무지막지하게 많기로 유명했다. 수안이 봤다는 테스터 모집 캠페인부터 특히 면접이나 심사에 대한 데이터는 기록이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떤 질문을 받았어?”

-그게⋯.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어디서 어떻게 진행한 건지. 이주 직전의 기억이라 업로딩 과정에서 유실되었나 싶었는데 그 앞 뒤의 기억은 다 멀쩡하거든요.

“그렇다면,”

-삭제된 거죠. 업로딩 중에 누가 일부러 제 데이터를 날린 거예요.

대체 얼마나 더 놀라야 하는 거지. 수안과 엮이고 나서는 하루도 잔잔한 날이 없었다. 회사가 공개된 적도 없는 기술력으로 은밀하게 수많은 사람을 베레시트로 이주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수안의 예측이 정확하다면, 바로 며칠 뒤, 인간이 현대 문명을 건설한 이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태양폭풍이 불어닥치고 완전 이주한 인간들은 다 물거품이 된다.

“이거 일이 너무 커지는데.”

아마 성과나 이권 다툼 같은 게 지저분하게 엮여있겠지. 거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수안까지 휘말려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똑 부러지게 말하고는 있지만 아직 어린 애기도 했다.

“진짜 골치 아픈데. 결국 회사랑 맞서야 하는 거잖아.”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거대기업이랑. 골이 아파진 현서와 다르게 수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런 답도 없는 일에 뛰어드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수안이 써낸 수많은 보고서를 보고 마음이 동해 이야기를 들은 건 괜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다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원래 인간은 다 알면서도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좌절하고, 다시 반복해요.

수안은 데이터의 집합에 불과했지만, 그 눈빛은 허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명료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잖아요.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는 게 아니라, 후회해도 좋을 만큼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그 순간 회사 메신저가 요란하게 울렸다. 장실장이 보낸 메시지들에 중요하다는 의미의 새빨간 점이 찍혀있었다. 현서는 쓸데없는 소리만 한가득인 장실장의 메시지를 모두 지워버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말이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러 연구 프로젝트를 거쳤지만 방송국에서 취재까지 온 건 처음이었다. 연구 주제에 국가적 관심이 쏠리는 건 분명 꽤 좋은 일이었다. 연구에는 언제나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고, 그 비용이 배정되는 건 결국 사람들의 관심에 기반하니까.

커다란 카메라와 조명을 든 사람들이 좁은 연구실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언니 부부가 사고를 당했을 때, 음주운전을 한 국회의원 아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기사 사진을 찍으러 장례식장에 밀고 들어오던 사람들처럼. 사고를 이용해 민심을 사려고 화려하게 치장한 채 나타났던 정치인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구현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관련법은 요란하게 발의했지만 끝끝내 제정되지는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가족들의 시위를 부추겼지만, 그게 죽은 언니와 남겨진 가족들에게 무슨 의미라는 건지 정민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임상 환자들이 흔쾌히 인터뷰를 하겠다고 한 건 의외였다. 특히 내향적이었던 Q까지 수락을 했을 때는 오히려 정민이 그들의 안위를 걱정할 정도였다.

촬영팀은 Q가 머리가 온갖 전극을 붙이고 검사받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방송이라고 해서 약간 긴장한 정민과는 다르게 Q는 검사 내내 꽤나 들떠 보였다. Q의 뇌는 역시나 신체 자극 테스트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G와 마찬가지로 의족인 오른쪽 다리에만 미세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인터뷰 바로 이어서 따.”

감독처럼 보이는 남자의 한 마디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위치를 바꿨다. 머리에 붙은 전극을 떼지 않은 기괴한 모습 그대로 Q가 말을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듯한 말이었다.

“저는 이 몸에 갇혀있습니다. 오직 한쪽 의족만이 제가 선택한 제 몸이라고 생각해요.”

선택. 정민은 노트에 Q의 단어를 받아 적었다. 자신의 신체를 이야기할 때 일반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였다. 확실히 신체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부여된 것이다. 정민은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베레시트 월드의 상징처럼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퀴어 퍼레이드에서였다. 그는 왜 동성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답했다. 그저 부여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과정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혹시 Q가 느끼는 불일치감이 같은 원인이라면?

“만약 이 증상을 완전히 없애주는 약이 있다면 드시겠어요?”

누군가 Q에게 질문을 던졌다. Q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아니라고 답했다.


“이 자체가 나예요.”


그렇게 말하는 Q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카메라 밑에 앉은 사람이 스케치북에 커다랗게 적은 글자를 펼쳐 보였다. ‘눈물 닦지 마세요.’ 그게 신호인 것처럼 Q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하루라도 온전한 제가 되고 싶어요. 신체에서 벗어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한참을 엉엉 우는 Q를 아무도 위로하지 않은 채 카메라만 연신 돌아갔다. Q는 제물이었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고귀한 희생자. 오늘 촬영은 저의가 따로 있다. 정민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해진 결말이 가장 극적으로 보이기 위한 장면들을 수집하고 있는 것이다.

정민은 자신이 해야 하는 역할을 생각했다. 확신을 가진 말이 아니라면 차라리 함구할 각오로.

“교수님께서 연구하고 계신 BDA 증후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Q가 실신 직전까지 울고 나서야 정민의 촬영이 시작됐다. 스케치북에 슥슥 글자가 적혔다. ‘핵심만 설명’. 아직 말을 시작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핵심만 말하라니.

“Body Detachment Syndrome, BDA 증후군은 자신의 신체 전반에 대해 자아감을 느끼지 못하고 낯설게 느끼는 뇌질환입니다. 학계에 보고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내측 전두엽부터 전두엽, 두정엽의 동작에 이상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최근 발견한 것은 우뇌의 상두정소엽이라는 부위가 연관이 깊⋯.”

뒤에서 모니터로 정민을 보고 있던 남자가 정민의 말을 자르며 ‘컷’을 외쳤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남자가 정민의 책상에 커다란 손바닥을 대고 비스듬히 서 정민을 내려다봤다. 위압적인 각도. 이 사람은 지금 협박을 하고 있다.

“연구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서 예쁘게 넣어드릴 거고요. 저희가 궁금한 건 치료법이에요.”

“질환의 원인을 연구해야 치료법이 도출할 수 있습니다. 그럴 단계도 아니고요.”

책상 위의 손에 굵은 핏대가 섰다. 남자는 불합리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정민은 의아했다.

“누가 뭐랬나? 연구는 교수님께서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환자들이 ‘원하는 치료’가 있을 거 아닙니까.”

상대가 비아냥대며 자신의 카드를 꺼냈다. 원하는 게 따로 있었던 것이다. 정민의 입에서 나오길 바라는 말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주. 이들이 베레시트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원하는 건 이주라는 키워드였다. 꽉 깨문 이가 뿌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정민은 접어줄 마음이 없었다.

“우울증의 치료법이 자살인가요? 그건 치료가 아닙니다.”

일순 분위기가 싸해지며 사람들이 지푸라기 인형처럼 멈춰 섰다. 카메라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무엇을 바랐던, 자신이 고르지 않은 말은 할 수 없었다. 정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BDA는 질환이에요. 그들은 아픈 거고, 그게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덕분에 온전한 제 자신을 찾게 되었어요.’


연구실에 촬영을 왔다는 정민의 연락을 받고 돌아서는데, 수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감동적인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 여자의 인터뷰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이미 10만 뷰를 넘어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베레시트의 첫 이주민 H입니다. 이주를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생한 자유를 얻었어요.’

여자는 20초마다 아바타 스킨을 바꿔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H는 이주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다. 영상 중간중간 H의 말을 보조하는 아름다운 인서트 컷이 들어갔다. 현서는 이 흐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서른 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앞두었던 저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걸 느끼시나요? 저는 매 순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건 신파극에서 사용하는 컴포지션. 관객을 감정적으로 설득하고 싶을 때 쓰는 영상 기법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영상은 불특정다수의 공감과 감정적 동요를 이끌어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말이었다.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단 하루라도 온전히 자유롭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제 비로소 진정한 제 자신이 된 것 같아요. 혹시나 저와 같은 아픔을 겪고 계신 분이 있다면, 베레시트에서 만나요!’

영상의 말미에 이 선전의 청자가 확실해졌다. 로어는 이주 희망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영상이 이미 여러 개가 동시에 업로드되어있는 상태였다. 돈 쓴 티가 잔뜩 나는 영상미와 감동적인 화자의 메시지가 어우러져 제법 바이럴이 되는 중이었다.

-유저 식별코드는 FB82T792341, 32세 여성이에요. 스킨 교체 타이밍을 기반으로 서버에 남은 로그를 추적했어요. 실제로 희귀 난치 혈액암을 앓던 환자였네요.

그런 데이터까지 접근하는 건 개인정보 위반 아닌가. 어차피 수안 님 자체도 회사 소유의 데이터일 텐데 큰 의미가 없으려나 싶기도 했다.
-나머지 영상들도 추적해 보면 누군지 특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안 님 말고 베타테스터가 더 있었던 거야?”

수안은 고개를 저으며 그건 자신도 몰랐다고 했다. 일이 점점 수상하게 흘러갔다. 이렇게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내부 직원들은 아무도 모른다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적어도 이 규모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인력이 있을 거고, 사람이 모여있으면 정보가 새기 마련이다. 우선 수안이 찾은 유저 개인 식별코드를 가지고 문서화된 기록이나 데이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찌나 꽁꽁 감춰뒀는지 문서 하나 찾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감사해요.

“뭐가?”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 거요.

수안이 씩 웃어 보였다.

“그냥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검증하지 않고 매도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현서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모두에게 공평한 재화이고, 나이가 들수록 그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회사에서도 조용히 숨어 지내다시피 했는데. 그런 현서가 황금 같은 휴일에 하루 종일 회사 데이터를 뒤지고 있는 건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하여간 양반 팔자는 못된다고 한숨을 내쉬는 현서에게 수안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로어는 왜 이런 일을 할까요.

“돈이 되니까.”

서비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락인(Lock-in)이다. 유저가 서비스에 대한 강한 팬심을 갖고 고착되어 이탈하지 않는 것. 충성고객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아서 고착화된 콘크리트 유저가 많은 서비스는 말 그대로 황금 노다지가 된다. 그런데 완전히 이주까지 한다면? 말 그대로 어장 속 물고기처럼 게임 안에 가둬지는 것이다. 완전 이주는 곧 완벽한 락인을 뜻했다.

게다가 베레시트는 애당초 과금 없이는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서비스였다. 진짜 삶을 유지하는데 수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처럼. 이런 세계 안으로 완전히 이주한 사람들이라면 현실에서 쓰던 재화들까지 게임 안에 쏟아붓겠지. 락인과 동시에 개인의 지출액도 한계 없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가둬진 사람들이 많을수록 베레시트는 정치권에서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성역이 될 가능성이 컸다.


“인질인 거야. 이 사람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금 문서를 찾아볼 때가 아니었다. 유저 데이터를 봐야 했다. 문득 장실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매달 추출하던 데이터가 떠올랐다. 게임에 가장 자주 방문하고, 오래 머무르며, 과금률이 가장 높은 유저 랭킹 데이터. 회사 내 은어로 이런 유저들을 황금 물고기라 불렀다. 빙글빙글 손을 흔드는 아름다운 금붕어의 꼬리의 이미지가 뇌리를 스쳤다.

“황금 물고기 리스트를 살펴봐야겠어.”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정민의 메시지였다.


[지금 만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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