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사람
-안녕하세요!
정민은 마치 수안을 없는 것처럼 지나쳤다. 신문물에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아예 XR기기를 착용하지 않을 줄이야. 현서가 급하게 이전에 쓰던 글래스를 꺼내 건넸다.
-안녕하세요?
수안이 다시 한번 인사하자 정민의 눈이 한껏 커졌다. 수안을 배려해 입모양으로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새 그걸 본 수안이 대답을 가로챘다.
-현서 님 회사 후임이에요. 하고 계신 BDA에 대한 연구 잘 봤습니다. 박사님 논문도 다 읽었어요!
“내가 다 이야기했어. 설명하자면 좀 긴데.”
하여간 좀 웃긴 상황이긴 했다. 실체도 없는 회사 후임과 수년 전 헤어진 전처와 함께 집에 모여 회사의 뒤를 캐고 있는 모양이라니.
“못 미덥겠지만 지금 희재에게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
정민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교수 모드로 돌아와 한쪽 스크린에 가득 자료를 띄웠다. 수안이 흥미롭게 그것들을 살펴봤다.
“이게 일반 사람의 뇌야. 이게 BDA 증상자의 뇌 스캔본이고.”
현서는 양분된 스크린에 뜬 뇌의 이미지를 지구본처럼 돌리며 훑어봤다. 이렇게 보여줘 봤자 일반 사람들은 모른다는 걸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현서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정민은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신체에 자극을 줬을 때의 반응이야.”
양쪽의 뇌 이미지에서 자극에 의해 활성되는 부분이 붉은색으로 깜빡였다.
“여기를 잘 봐. 뇌의 상두정소엽이라는 부분인데⋯,”
-신체 지도를 그리고 저장하는 곳이죠?
현서와 정민이 제법이라는 듯이 수안을 쳐다봤다.
-논문 다 읽었다는 말 안 믿으셨나 보네.
정민이 재빨리 본론으로 돌아왔다.
“여기가 마치 죽은 것처럼 반응하지 않지?”
정말이었다. 스크린 왼쪽의 정상 뇌에서는 신체에 자극을 줄 때마다 빨갛게 활성되는 부위가 오른쪽 뇌에서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체에 대한 일체감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
“이런 환자의 뇌를 수백 개 들여다보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어.”
“이건⋯⋯.”
상두정소엽이라고 불렀던 그 부위에 까만 점이 찍혀있었다. 정민은 현서가 집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 점을 크게 확대했다. 아주 미세하게 여섯 개의 다리 같은 형체가 달려있는 게 보였다.
“치료용 나노 로봇이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녹아 없어지게 설계된 모델인데, 미쳐 다 녹지 못한 시점에 촬영된 거지.”
정말이었다. 더 확대하자 몸통 같은 부분이 두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있고 이음새 부분에 박힌 나사의 생김새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건 문외한인 현서가 봐도 명확하게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있을 것이라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이질적인 형상이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듯 멍해졌다.
“이 로봇이 상두정소엽의 시냅스들을 파괴한 것 같아. 아니, 거의 확실해. 로봇이 멈춘 자리를 기준으로 시냅스가 파괴된 쪽과 파괴되지 않은 쪽으로 경계 져있어.”
갑작스러운 나노 로봇의 등장에 당황해서 현서는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반면 정민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위급상황에서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는 게 정민의 멋진 점이기도 했다.
-의심되는 정황이 있나요?
수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민이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 앞으로 하려는 말들의 파급력을 머릿속으로 계산해보고 있을 것이다. 현서와 수안이 받을 충격까지 고려한 후 비로소 고르고 고른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신종 플루. 이 환자는 비교적 아주 최근에 알파 플루를 맞은 기록이 있었어. 그래서 그간 임상 환자들의 의료기록을 다시 다 뽑아봤는데 역시나 모두가 같은 이력이 있었어. 알파 플루를 맞은 한 달 이내에 BDA가 발병한 거야.”
알파 플루라면 로어바이오에서 개발한 신종 플루 치료제였다. 뛰어난 AI 기술로 연구 개발한 덕에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온 치료제였고,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파 플루를 맞았다.
“얼만큼 확신해?”
정민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알파 플루를 맞아 BDA 환자가 되었다는 것보다, BDA 환자들이 우연히도 이전에 신종 플루에 걸린 이력이 있다고 보는 게 더 일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종 플루는 엄청난 전염성으로 인류의 40% 이상이 감염되었던 전염병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은 알파 플루를 맞았을 텐데, 그럼 전체 인구의 20%는 BDA 환자여야 했다.
질식할 것처럼 무거운 적막이 공간을 덮쳤다. 각자 자신만의 퍼즐을 맞춰보고 있는 듯했다. 현서에게는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다. 아직 정확하지 않았다.
“수안 님, 이주 홍보영상에 출연한 사람들 의료기록도 찾아볼 수 있을까?”
-이주 적격 심사 데이터가 남아있다면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못 찾겠어요.
“일단 그 사람들 식별코드 리스트부터 추려봐 봐.”
-현서 님이 이미 보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그러신 줄 알고 안 해둔 건데.
수안이 현서의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에 띄웠다. 아니, 이건 황금 물고기 리스트였다. 수안은 홍보영상 속 사람들의 식별코드와 황금 물고기 유저들의 코드가 완전히 같다고 말했다. 그건 당연한 인과였다. 이미 이주를 했으니 베레시트에 가장 자주 방문하고, 오래 머무르고, 과금을 많이 할 수밖에. 그런데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들은 언제부터 황금 물고기였을까.
현서는 떨리는 손으로 데이터 조회 일자를 5년 전으로 설정했다. 2042년 7월로 숫자가 맞춰지고, 그 달의 황금 물고기 리스트를 호출했다. 숫자가 로드되며 익숙한 ID와 식별번호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리스트가 한 줄 나타날 때마다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모든 게 정확히 일치했다. 홍보 영상 속 이주민들은 이주 전부터 이미 황금 물고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모든 게 조작된 거예요.
신희재. 현서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이미 브레이크는 작동하지 않은지 오래였다. 현서가 머릿속에서만 맞춰보던 퍼즐을 수안이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내놨다.
-로어가 의도적으로 BDA 환자를 만들고 있어요. 베레시트로 이주시킬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삶이라는 거대한 질문. 이건 그에 대한 희재의 답이었다. 희재는 무언가를 챙기려고 꺼내 들었던 커다란 가방을 홀가분하게 던져버렸다. 어차피 이런 건 이제 필요 없을 테니까. 돌아보니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물건은 거추장스러운 몸의 것이었다. 삶이 이토록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인 것이다.
이모는 분명 안된다고 할 게 뻔했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 기회였다. 스스로 삶을 구원할 유일한 길. 나갈 채비를 하며 구식 바디 센서를 부착하고 구식 고글을 꼈다. 구식 기기들은 이전 기술의 한계로 아바타 싱크에 아주 미묘한 딜레이가 생긴다. 다른 사람들은 멀미가 나는 탓에 견디지 못하고 신식 기기로 갈아탔지만 희재는 그때 느껴지는 자신과 몸의 분리감이 좋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는 멀미감이 희재가 매일 느끼는 감각에 가까웠다.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
장롱 서랍을 열어 깊숙한 구석에 숨겨둔 낡은 담요를 꺼냈다. 귀여운 기린 캐릭터가 패턴처럼 수놓아진 면 담요는 희재의 애착 담요였다. 지금은 턱없이 작지만, 어린아이를 두 번을 감고도 남을 크기였다. 아기였던 희재는 포근하게 안겨 쌕쌕 숨을 쉬며 깊은 잠을 잤을 것이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사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사망한 커다란 교통사고에서 희재만 살아남은 것은 필사적으로 희재를 보호한 엄마 덕이었다. 생명을 빚졌는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건 희재를 불균형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공백을 가지고 기울어진 채 살아가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담요 속으로 숨어 과거의 온기를 느꼈다. 몸이 점점 커져 이제는 겨우 담요를 걸치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곧 있으면 그 마저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이 완벽한 타이밍이다. 희재는 몸이 없이 눈을 뜨는 첫날을 상상했다. 킨코의 성전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봤던 경계가 사라지는 생생한 느낌,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은 기분 같은 것들. 장면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모든 게 완벽한 행복일 거라는 건 확신했다. 얼마나 가벼울까. 얼마나 큰 해방감이 들까. 얼마나 온전할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를 가두고 있던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완전한 자유. 오랫동안 꿈꿔왔던 현실을 실현할 때가 된 것이다. 이모는 희재를 아직도 어린아이 취급하지만, 스스로는 충분히 컸다고 생각했다. 시야 한쪽에 킨코가 보낸 알림이 떴다가 비눗방울처럼 터졌다.
[그때 말했던 거기서 만나.]
담요를 어깨에 질끈 동여 메고, 미리 써두었던 편지를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나서는 길에 단 한 번, 마지막으로 집의 풍경을 돌아봤다. 다시 이곳에 돌아온다는 건 실패를 의미했다. 희재의 눈에 담긴 집의 구석구석은 꽤나 사랑스러운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머무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온 세상이 집일 것이다.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까. 원한다면 베레시트 안에 초현실적인 집을 가질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거다. 이 몸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어떤 제약도 없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설 수 있다. 1세대 이주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도 많을 것이다. 스킨을 잔뜩 사고 닉네임도 변경해 아예 다른 존재로 살아도 좋겠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채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삶. 새해 같은 설렘에 심장이 뛰다가 문득 이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모는 분명 슬퍼할 것이다. 그게 희재의 마음을 저릿하게 하기도 했다. 이모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핑계대자면 모든 건 이모의 탓이었다. 이모가 이해해 줬다면 이렇게 말없이 떠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모의 연구실에 다짜고짜 찾아갔던 그날, 희재는 말 그대로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그때의 발악은 살려달라는 외침이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육체에 갇혀 지내는 감각이 소름 끼치게 역겹고, 토할 듯 멀미가 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메스로 몸을 찢어버리면 결박된 영혼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충동을 참을 수 없어 강제로 안정제를 맞고, 온갖 약을 먹었지만 일시적으로 진정이 될 뿐 희재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질 리가 없었다. 희재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이모가 희재를 인정하지 않을수록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희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아무도 희재의 힘겨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절대로, 괴물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냥 자신으로 존재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모와 그 부분에 이해가 다르다면, 싸울 것이 아니라 떠나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희재에게만 있었다. 이모는 절대 희재를 떠나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이모도 날 이해하겠지. 이모가 그렇게 애써준다면.
희재가 쓴 편지의 문장도 그러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언젠가 그런 상태로 이모가 자신을 만나러 와주길 바랐다. 그곳에서 온전한 희재를 마주해 주길 바랐다.
킨코는 희재를 그 자체로 이해해 준 유일한 존재였다. 기적처럼 일어난 지난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로봇 택시가 로어게임즈 앞에 도착해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성전처럼 높은 천장과 온갖 첨단 기술을 전비하고 있는 로비에 어떤지 기가 죽었다. 특히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게이트 위로 인물인식 카메라가 360도 방향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또다시 알림이 울렸다.
[널 위한 모든 준비를 다 해두었어. 기다리고 있어.]
킨코의 메시지에 용기를 얻은 희재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묘한 긴장에 식은땀이 흘렀다. 걱정과는 다르게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게이트의 차단막이 위로 환영한다는 안내 문구와 함께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맨 앞의 엘리베이터에 희재의 이름이 나타났다. 킨코가 정말 모든 것을 준비해 둔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할 것 없어.]
엘리베이터는 미끄러지듯 빠르게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잠시 귀가 멍해져 들린 이명도 자유를 선포하는 축포소리처럼 들렸다.
“수안 님, 이거 그만하자.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해결하는데요?
수안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정민이 영문을 모르는 채로 흥분한 둘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현서는 보기 드물게 화가 나 보였다. 단순히 지금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차갑게 굳은 얼굴에서 알 수 없게도 절망이 엿보이는 듯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짙은.
“그래서 어떻게 해결할 건데. 전 세계 시총 1, 2위를 다투는 기업을 대상으로 뭘 할 수 있는데?”
-뭐라도 해봐야죠. 그럼 이런 부조리를 알고도 가만히 있는 게, 그게 현서 님이 원하는 거예요?
“회사는 원래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야. 그걸 위해서 뭐든 하라고 사람들한테 월급을 주는 거고.”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모든 상황을 조작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거예요?
수안이 콧방귀를 뀌며 맞받아 쳤다. 둘 다 한 발짝도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내가 보기엔 대책 없이 정의 타령하는 건 수안 님이나 회사나 똑같아 보이는데.”
서로 점점 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걸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정민이 현서를 막아섰다.
“잠깐만, 너 대체 뭐에 화가 난 거야?”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설명이 필요했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해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제야 현서가 숨을 몰아 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엇에 화가 난 걸까. 현서는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수안을 바라봤다.
확실한 건 수안도, 회사도, 모두를 기만하고 있는 이 상황 때문도 아니었다. 정민의 눈빛이 느껴졌다. 현서는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현서는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상황을 외면한, 환경에 순응한, 수많은 일에 치여 지쳐버린,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멈춰버린. 그 모든 자신에게 향하는 분노였다.
-무언가를 옳다고 여기는 게 겁나세요?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스스로를 벌주며 살고 계세요?
수안이 생각에 잠긴 현서를 향해 힘껏 찬물을 뿌렸다. 일어나라며 잠든 귓가에 소리를 지른 것만 같았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려 하던 그때, 정민의 계정에 알림이 울렸다. 베레시트에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었다.
“그게 무슨⋯,”
[신희재 님께서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둘 다 잠깐만! 희재가⋯⋯.”
메세지를 확인하는 정민의 손이 떨렸다. 뭔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희재가 가출했어.”
정민은 곧바로 베레시트에 접속해 워프 아이템을 사용했고, 현서와 수안도 재빨리 워프에 뛰어들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비주얼 이펙트와 함께 모든 풍경이 정민의 집으로 바뀌었다. 현관 신발장에 종이 한 장에 반으로 접혀 놓여있었다. 정확히 언제 설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약 메세지임을 알려주는 뱃지가 붙어있었다. 정민이 편지를 펼치자 허공에 비뚤게 쓰여진 글자들이 나타났다.
손으로 쓰는 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아주 어릴 때 배웠던 터라 글씨 쓰는 법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꽤 자연스럽게 써지네. 물론 이게 마지막이겠지만 말이야.
가끔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봐. 내가 나였던 가장 처음의 기억을. 가까스로 더듬다 보면 갑자기 깨어난 듯 어지러운 어떤 순간이 떠올라. 다섯 살 즈음이었지.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고 우는 소리가 소란스러운데, 내 귀에는 물먹은 솜을 끼운 것처럼 모든 소리가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뭉개져서 들리는 기억. 너무 추운데 몸에서는 펄펄 열이 끓어서 괴로워. 괴롭다고 말하고 싶은데 생각이 언어로 정제되지 않아 나는 그냥 울어버리지.
그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나에게 갑자기 누군가 다가오고 모든 게 꿈처럼 허물어져. 고통도 추위도 어지러움도 다 꿈이었던 것처럼 내 피부에 닿는 따스함에 녹아버리는 거야. 그리고 또렷한 말소리가 들려.
내 모든 걸 잃더라도 네 편이 되어줄게.
아마도 그때 나는 그 목소리에서 새로 태어났나 봐. 그게 나의 최초의 기억이고 내가 느낀 최초의 따스함이었으니까. 내가 엄마와 아빠를 잃었던 그날, 동시에 친언니와 형부를 잃었던 이모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맨날 고맙다고 말하면서 자꾸 속 썩여서 미안해, 이모. 근데 나는 단 한 번도 이모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맹세코 모든 순간에 내가 느끼는 걸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했어. 믿고 믿지 않고는 이모의 몫이니 내가 강요할 수 없겠지.
그치만 나는 알아. 매 순간 느낄 수 있어. 나는 내 진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야. 그게 설령 이모에게 끔찍하게 싫은 일이라도, 내가 내가 되는 걸 양보할 수는 없는 걸.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이모를 이해해. 나는 믿어. 언젠가 이모도 날 이해할 거야. 이모가 그렇게 애써준다면.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꼭 나를 만나러 와줘. 어차피 나는 이제 늙지 않고, 잊지도 않을 테니. 모든 게 바뀌어도 이모만은 나를 알아볼 수 있겠지. 영원히 기다릴게.
⎯ 희재
-이것도 스스로 ‘선택’ 한 거라고 할 수 있나요? 겨우 중학생인데?
마주 서서 수안을 바라보는데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수안이 현서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현서는 더 이상 받아칠 말이 없음을 알았다.
-현서 님이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저는 몰라요. 그간 살면서 여기저기 치였겠죠. 애썼지만 패배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지치고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는 것도 이해해요. 그렇지만⋯.
수안의 손이 현서의 손에 맞닿았다. 누군가와 손을 맞대어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촉각 구현이 이렇게 섬세하게 되어있는지는 몰랐는데, 닿은 부분부터 온기가 스며들었다.
-현서 님은 옳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에요. 제가 본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끈질기게. 그러니 스스로를 위해 한 번만 더 물어봐주세요. 정말 이 모든 일이 무의미한가요? 정말 그런가요?
거의 애원하는 듯한 수안의 목소리가 깊은 어딘가를 쿵쿵 울렸다. 아무래도 수안의 마음은 기체로 되어있나 보다. 애써 막아보려 해도 걷잡을 수 없이 흘러들어오는 마음이 너무 강렬해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수안 님만 상처받을 수도 있어. 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다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고마운 줄도 모를 거야. 오히려 방해했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회사를 거스른 대가는 우리만 혹독히 치르게 될 거야. 그 모든 게 정말 각오가 되어있어?”
-걱정 마세요. 온 세상에게 미움을 받아도 견딜 수 있어요. 저는 저를 아니까.
어떻게 이렇게나 단언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흔들림 없이 자신을 믿고, 타인을 믿고, 모든 걸 내던질 수 있을까.
-그리고 현서 님이 저를 알잖아요. 그럼 됐어요.
수안의 말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했다. 옳다고 쌓았던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지. 내가 고른 것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뾰족한 불안이었다. 수많은 과정을 통해 안착한 지금의 태도가 정말 원했던 것일까. 어쩌면 내몰려 앉은자리였을까. 그러나 그 날카로움이 좋았다.
비로소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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