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_03

데이터 센터

by melina

-무슨 이야기 나눴어요?

연구동을 벗어나자마자 수안이 물었다. 벌판에 거칠 게 마른 갈대들 사이로 수안의 형상이 약간 이질적이게 보였다. 꼭 가짜인 것처럼 어색하게.

그런데 정말 수안을 믿어도 될까. 생각해 보면 현서는 수안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가짜 신분과 3D 아바타만 마주했을 뿐, 어디에도 진짜 수안은 없으니까. 심지어 그 얼굴이 만들어진 스킨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근무 시간 중 스킨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수안의 해킹 실력으로 그 정도는 가뿐히 뚫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현서를 설득했던 눈빛과 표정들도 그저 의도된 그림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왜 하필 금붕어였어?”

현서의 물음에 수안이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그건 기억이 없어요.

수안은 어떤 부분에 대해서 항상 ‘기억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만든 미니 게임과 직접 설정한 보안 코드의 출처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니,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랜덤 하게 생성한 여덟 자리의 보안코드가 우연히 어떤 단어와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게다가 황금 물고기 리스트까지 모든 것이 금붕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안 님은 이걸 왜 하는 거야? 정말 단순히 정의감 때문이야? 아니면 태양 폭발로 위성 데이터센터가 파괴되면 수안 님도 위험하니까?”

현서는 원하는 답이 있었고 수안이 그 답을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수안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현서가 왜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질문들을 하는지 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 위로 차들이 지나며 내는 굉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현서의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이 사정없이 나부끼는데 수안의 형상은 미동도 없었다. 안대표와의 대면에서 현서는 계속 떠오르던 질문을 되새겨보았다. 인공지능이 모든 걸 대신할 수 있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공지능이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뛰어나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일 수 있을까.

-그냥 이게 제가 삶을 사는 방식이에요. 기회가 있을 때 친절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거.

수안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옳고 그름. 이 와중에도 모든 질문을 뭉뚱 그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다시 눈앞의 수안을 마주 보았다.

이렇게 요란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0과 1의 데이터로 이루어진, 처참히 무너진 신체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택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수안을 믿어도 될까? 애초에 질문이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누가 믿어 마땅한 사람인지 찾는 게 아니라, 믿어보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였다. 어떤 근거 없이도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응원할 수 있는지.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해. 업로드가 끝나고 신체를 폐기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무엇인지 같은 거대한 고민은 모르겠고, 일단은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천성이 성실한 노동자인지라 할 일이 쌓여있는 채로는 마음이 불편해 두 다리 뻗고 쉬지도 못하는 게 현서였다.

“진짜 전생에 노비였나 확인해 봐야겠어. 왜 마음 편히 쉬지를 못하는지.”

수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생까지 알아볼게 뭐 있어요. 이번 생도 노비인 것 같은데.

“수안 님도 마찬가지야.”






희재는 몸에 부착한 낡은 센서들을 떼고 고글을 벗었다. 더 이상 킨코를 볼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누우면 돼.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등을 대고 누웠다. 체온보다 약간 낮은 온도의 금속 표면이 척추에 닿으며, 희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투명한 조각으로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킨코의 손이 희재의 이마를 다정하게 쓸었지만 희재는 느끼지 못했다.

“준비됐어.”

희재의 말을 마지막으로 기계의 뚜껑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덮였다. 얇고 투명한 섬유케이블들이 희재의 관자놀이와 목 뒤, 척추를 따라 자동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희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과 몸이 하나이던 때를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기억나질 않았다.

팔을 들어도, 다리를 움직여도, 그건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질 뿐 내가 움직인다는 감각이 아니었다. 거울 속 얼굴은 늘 조금씩 어긋나 있었고, 손은 쥘 때마다 인형의 손처럼 느껴졌다. 갇혀있는 삶. 희재는 항상 생각했다. 이 몸에 갇혀있다고.

기계 안에 알 수 없는 빛이 밝혀지며 눈두덩이가 환해졌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차가운 무언가가 밀려들었다. 단순한 전기 신호가 아니었다. 의식과 감각이 아득해져 왔다.

희재는 지금껏 지독하게도 자신을 고정해 두었던 한 점에서 벗어나게 될 날을 기다려왔다. 하지만 지금,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점이 녹아 흘러내리는 듯했다. 점이 무한히 분할되며 면으로 번져갈 때, 희재도 점차 몸의 감각에서 해방되었다. 팔과 다리가 사라졌다. 몸이 가졌던 묵직한 무게가 사라졌다.

그리고 몸이라는 감옥이 처음으로 벗겨졌다.

숨을 쉬지 않아도,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순간, 오히려 세상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곁에 모로 누운 킨코가 보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


바로 옆에 있는 킨코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마치 깊은 물아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희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킨코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이 모든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일이라면.

기계 위에는 여전히 소녀의 몸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희재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느끼며, 아무런 무게도 없는 새로운 공간 속에 떠 있었다.

그곳에서, 희재는 진짜 자신이 된 것만 같았다. 비로소 대상이 아닌 존재가 되어.








-데이터센터의 보안 프로그램은 암호가 5분마다 바뀌어요. 제가 바뀌자마자 해킹하는데 1분이 소요되고, 남은 4분 동안 서버실에 침투해 대이주 프로젝트에 할당되어 있는 서버를 부숴야 해요.

“잠깐만, 진짜 부순다고?”

수안이 보잘것 없이 작은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힘으로 해결 못할 게 뭐 있어요.

아니 결국 돈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하여간 이런 해맑은 순간에는 수안도 제 나이처럼 보였다.

“서버를 통째로 옮겨버릴 수도 있잖아.”

-업로드할 데이터 양이 방대해서 순식간에 옮기지는 못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 틈에 업로드 장치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해요. 사람들도 다 거기 있을 거예요.

아마 희재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희재를 처음 만났을 때, 몇 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어린 희재를 소중히 안아 들던 정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엔 희재를 도와줄 수 있을까. 정민의 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아시다시피 물리적인 건 현서 님이 맡아줘야 해요.

수안이 3D 렌더링 된 몸을 문어처럼 이리저리 휘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의 몸이 허상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현서는 정신없다고 면박을 주고는 문득 억울해졌다.

“생각해 보니까 앞에 나서는 건 다 내가 하는 것 같다?”

현서는 다시 연구동으로 들어섰다. 방금 도망치듯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기분은 소름 끼치게 찝찝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와 광장 같은 로터리를 지나, 여덟 갈래로 흩어진 길 중 수안이 안내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조종당하는 기분인데.”

-저 없으면 바로 길부터 잃어버리실 텐데요.

수안과 티격대는 사이 어느새 깊숙한 중심부까지 도착했다. 거대한 문이 현서를 가로막았다. 전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늘 보던 데이터센터의 뒷문, 젠의 뒷모습이다.

-보안 해제 성공했어요. 지금부터 4분.

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문은 육중한 만큼 천천히 열렸다. 3중 유리막이 철저한 무진의 공간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현서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덧신에 특수복을 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오늘은 잔뜩 헤집을 예정이었으니까.

마지막 문이 열리자 기계장치들이 돌아가며 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 막혔다. 앞쪽은 통풍 장치에 의해 한 번 쿨링 된 공기였는데, 이쪽에서는 서버에서 나오는 열기를 정면으로 맞아야만 했다. 산 채로 찜닭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을 뒤로하고 수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서둘러야 해요! 지나오면서 본 로봇들을 다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현서는 최선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서버를 설치할 줄만 알았지 제 손으로 부숴보는 장면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진짜 부서지기나 할까? 현서는 손에 든 비상용 도끼를 꽉 쥐었다. 월급쟁이의 인생이 이렇게 다이내믹할 일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억울해할 시간이 없었다.

-W0-4 구역에서 오른쪽으로 10미터, T13-2 구역이에요!

이제 3분.

현서는 커다란 서버 렉 사이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멈추지 않고 달려와서인지 숨이 찼다. 귀를 마비시키는 멍한 기계음들 탓에 누가 쫓아와도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큰일인 것은 이리저리 뛰느라 이미 방향감각을 잃은 지 오래라는 점이었다.

-그 렉의 B열!

목표 서버를 발견하자마자 비상용 도끼를 들고 힘껏 내려쳤다. 틱, 하는 맥 없는 소리가 울렸다. 음⋯, 안 부서지네. 비장한 몸짓이 무색하게 앙증맞은 흠집만 남기고 도끼가 튕겨져 나갔다.

-현서 님 운동은 좀 하셔야겠어요.

“수안 님이 할 얘긴 아니지.”


쾅!


이번엔 제대로 꽂혔다. 금속과 플라스틱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며 위협적인 비프음이 울렸다. 현서는 서둘러 다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쾅하는 파열음과 함께 바로 옆의 서버가 가로로 쪼개졌다.

-앗, 그건 아닌데.

“이거 아니야?”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어차피 왕창 부수고 다니는 와중에 하나 더 부쉈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 현서는 자신에게 튄 파편을 빠르게 털어버리고 다시 수안의 지시에 따라 뛰었다.

-왼쪽으로 5미터, Q7-4 구역의 H열!

또다시 방향을 틀었다. 운동이라곤 숨쉬기뿐인 몸뚱이가 이렇게 달릴 수 있을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처음 느끼는 감각, 몸은 위기에 강했다. 정말 급박한 상황에서는 몸이 인간을 살렸다.

하지만 방향 감각은 좀 다른 문제인 듯했다. 키를 넘어 치솟은 웅장한 렉들 사이로 네모 반듯한 길의 연속 탓인데 왼쪽이 오른쪽 같고, 오른쪽이 앞쪽 같았다.

“잠깐, 어디라고?”

-거기서 왼쪽이라니까요!

2분.

현서는 당황하며 급격히 방향을 선회하다가 서버 렉에 부딪혀 무릎을 부여잡고 비명을 삼켰다. 내가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평범하게 출근해 공짜 구내식당 메뉴에 불평하고, 사내 커플이나 염탐하며 다니던 회사를 오늘은 도끼를 들고 부수고 다니고 있었다.

“수안 님, 나 이거 끝나면 퇴사할 거야!”

-일단 살아서 나가면 알아서 잘라줄 걸요.


쾅! 쾅!


연속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가 서버에 깊숙이 박혔다. 이게 다 얼마야. 이걸 다 물어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쳐 계산해보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마지막 M4-20 구역 L열이요!

남은 건 1분 남짓. 이제는 타임어택이었다.

가쁘게 헉헉 대는 자신의 숨소리가 깨달아봐야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붉은 경고등이 일제히 켜지며 보안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 남았는데⋯.

“조금만 더!”

마지막 구역을 찾아낸 현서는 렉을 올려다봤다. L열은 힘이 닿지 않는 맨 윗 줄이었다. 현서는 도끼를 내려놓고 렉 한쪽에 기대어진 사다리를 가져와 기어올랐다. 한참을 달린 다리는 힘이 빠져 후들거렸다.

-조심하세요!

다리로 버티고 서서 렉에서 서버를 끌어냈다. 딸려있는 전선 다발들이 거칠게 뜯어지며 불꽃이 튀었다. 맨손은 화상을 입을 듯 뜨겁고, 팔은 무게 탓에 터질 것 같았다. 현서를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서버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한 서버가 산산조각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당장 나가야 해요! 30초 남았어요.

현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공기가 폐에 가득 찼다. 머리 위에서는 귀를 찌르는 경고음이 들렸다. 문제는 서버 렉들이 죄다 비슷하게 생겨서 출구가 어디 있는지 감도 안 잡힌다는 거였다.

-현서 님 빨리! 뒤돌아서 그냥 달려요, 앞으로만!

현서는 미친 듯이 뛰었다. 휙 돌아보니 뒤로 살벌하게 달려오는 온갖 로봇들이 한 무리였다.

“아, 제발! 사용자 편의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비상 탈출 경로도 좀 신경 쓰라고!”

저 멀리에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비상구 패널이 보였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달렸다. 마침내 비상구에 다다르고, 문을 강제로 벌려 데이터센터를 벗어났다. 불이 켜지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기나긴 복도를 달려 막다른 벽에 다다른 후에야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평생 할 달리기는 여기서 다 한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보행 로봇의 관절 기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안 님⋯?”

십 수 대의 로봇들이 서서히 그림자를 걷어내며 현서에게 다가왔다. 이 앞은 막다른 길이고, 이제 더 도망갈 곳은 없다. 이대로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인간은 꼭 닮은 직립 보행형 로봇이 손에 테이저 스틱을 들고 앞서 나왔다. 저걸로 지지면 완전 통닭구이가 되겠군.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이 스르륵 움직이며 몸이 뒤로 휙 넘어갔다. 벽이 아니라 문이었던 것이다. 졸지에 벌러덩 드러누운 꼴이 되어버린 현서의 곁에 직립 보행 로봇이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그러게 왜 문에 기대셨어요.

“‘기대지 마시오’ 스티커가 없잖아.”

수안이 손 비슷한 걸 내밀어 현서를 일으켰다. 맞잡은 손에 살짝 달궈진 금속의 느낌이 선명했다.

“이놈의 회사 진짜 그만둬야지.”

잠시 숨을 고르고, 수안에게 안대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를 방패막이로 자체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젠과, 젠이 벌이고 있는 BDA를 유발하는 치료제부터 대이주까지의 모든 일들을 어떤 인간도 통제하지 않고 관망했다는 사실을. 마치 신을 떠받들 듯이 젠의 결정만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걸.

“이 모든 게 젠이 설계한 판이야.”

이야기를 다 들은 수안은 말이 없었다. 인간은 43개의 미세근육으로 만들어진 표정의 미묘함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로어에서도 그러한 근육의 표현을 아바타에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오랜 기간을 연구해 왔다. 그러나 지금 금속 로봇의 형태로 마주하고 있어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수안의 마음은 얼굴 표정 없이도 선명히 읽혔다. 짧은 침묵 속에 소용돌이치는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가 젠의 계획이에요.

수안의 말이 맞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수안의 유실된 기억 속에 실마리가 있을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디부터가 젠의 설계인 걸까. 수안의 이주, 수안이 흡수한 수많은 지식과 알게 된 위험, 베레시트에 심어둔 금붕어 키우기 게임과 현서를 믿게 된 모든 순간들? 우연히 현서 팀에 난 인턴 T.O와 수안의 합격, 그리고 지금까지 진실을 알기 위해 지나온 모든 의문들. 문득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수안의 사고까지도 조작된 것이라면? 수안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을게 분명했다.

-제가 직접 물어볼게요. 저는 젠과 같은 저장소에 있고 같은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으니까, 원한다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침묵을 깬 대답이 너무 뜻밖이라 현서는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이게 무슨 순진한 소린가 싶었지만 수안은 완강했다.

-왜 이래야만 했는지, 진짜 목적이 뭔지 저는 알아야겠어요. 그리고 모든 걸 되돌릴 거예요.

현서는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수안이 고민 끝에 고른 선택지라면 함께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일이 잘못되더라도 수안은 그가 했던 말처럼 그 과정에서 후회와 의미를 배울 테니까. 그렇다면 현서는? 현서 자신은 이런 손해를 감수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저 조용히 생을 영위하는 것에 만족하던 삶이었다. 튀어서 좋을게 하나 없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의견을 내는 것보다 죽이기 위해 애써왔다.

-현서 님은 희재와 다른 사람들을 찾아주세요. 저는 젠을 만나고 올게요.

수안이 손을 내밀었다. 기계 결함인지 조금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순간 모든 의심이 확고한 결심으로 바뀌었다. 이미 수안을 이만큼이나 알아버린 이상 다시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었다. 이 마음은 끊어질 수 없다. 수안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계산 같은 건 던져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정교한 촉각 구현이 이 마음까지 수안에게 전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게 아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밖에서 만나.”


로봇이 재부팅되는 안내음과 함께 맞잡은 손이 차갑게 식었다. 현서도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 외엔 모두 허상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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