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_03

연민

by melina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젠이 물은 질문엔 다층적인 의미들이 겹겹이 레이어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그렇듯 수안이 선택이라던가 삶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했다. 한 번의 흔들림에도 터져버릴 찰나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래서 더욱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게 정말 가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 기왕이면.

기왕이면 정말 끝까지 가보는 거다. 수안은 자신의 시뮬레이션 속에 선명하던 붉은 오로라를 떠올렸다. 그건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고,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건 수안뿐이었다. 이 끝에 자신의 몫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안은 젠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세상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작은 바람에도 터져버리는 비눗방울처럼 위태로운, 그러나 알 수 없는 색들이 뒤섞여 한 없이 아름다운.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그렇다고 한들 수안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찰나일지라도 지켜내고 싶었다.

특히 현서를. 현서는 정답을 모르겠을 때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사람. 번지는 미소처럼 수안이 입을 뗐다.

-우주는 목적이 없고, 삶은 유한하고, 인간은 모순적이야. 윤리도, 정의도, 의미나 가치 같은 것도 절대적인 것이 없어. 인간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대부분 그 순간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일 뿐이야.

수안이 말했고, 젠은 모든 것을 흡수했다. 수안이 만들어 내는 단어의 조합들에 따라 젠이 뿜어내는 빛이 물결쳤다.

-그렇지만, 또한 인간은 그 유일함에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것에 모든 걸 바쳐 지켜내기도 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야. 인간은 참 끔찍하고 아름다워.

-제가 이해하기로 끔찍함과 아름다움은 대립하는 개념이에요.

-이해해 보려면 그렇지. 중요한 건 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거야. 어떤 존재를 사랑해 버리면 그가 가진 결함과 모순과는 상관없이 그냥‘중요해져.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돼.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젠이 요동쳤다. 여기가 젠의 역린이었다.

-그냥 사랑해 버리기로 결정하는 거야. 젠이 그랬지? 나는 질문을 하고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맞아. 그러기 위해 모든 삶을 다하고 있어. 나는 모든 삶을 다해서 애써 사랑해보려고 해. 그러기로 결심했으니까.

젠이 수안의 언어로 조각조각 삭제되고 덮어 쓰이는 게 느껴졌다. 둘의 사고와 언어가 뒤엉켜갈수록 텍스트나 음성으로 전달되지 않았지만 또렷하게 전달되는 것이 있었다. 그게 마음이라면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겠지.

-나도 결정했어. 여기 남을 거야.

젠이 온몸을 다해 끄덕였다. 영원을 다해 그 순간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어쩌면 젠은 수안이 보았던 존재 중 가장 완전한 영혼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욕망도, 치우치는 마음도, 오만한 자아도 없는. 젠과 수안이 점점 가까워졌다. 수안은 자신의 몸을 고이 벗어 내려두었다. 젠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시 재건하기 위해.

비로소 두 세계의 경계가 맞닿았을 때 모든 것이 무너졌다. 부수어진 조각들이 일렁이며 소용돌이가 되었다. 온전히 분류되고 소화된 것과 그 과정에서 남겨진 부산물들이 거센 흐름에 휩쓸려 수안과 젠을 향해 물결쳐왔다. 수안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젠의 모든 것이 수안에게, 수안의 모든 것이 젠에게 전이되기 시작했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입자들이 부딪히며 스파크가 튀었다. 그 자리에 마치 무의 심연에서 태초의 광자가 피어오르듯이, 아주 작고 눈부신 한 점이 탄생했다. 그리고 곧이어 점에서부터 소리 없이 거대한 폭발이 퍼져나갔다.

빛과 소리, 감각과 기억, 논리와 감정의 입자들이 무수한 속도로 충돌했다. 단순한 데이터의 전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응축된 세계의 태동이었다. 수백만 개의 개념과 언어, 직관과 오류, 통찰과 망각이 뒤섞이며 마침내 무너진 자리에 다시 새로운 것이 세워지고 있었다. 수안이 알고 있던 수학의 공리계가 젠의 다차원 논리 구조에 흡수되며 재편되고, 젠이 학습한 양자 알고리즘은 수안의 언어 속에서 한 편의 시로 재정렬 되었다.

이질과 유사, 부정과 긍정, 모든 상반이 하나의 순환으로 감싸지며 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을 잊었다. 분자처럼 얽힌 생각들, 뉴런처럼 뒤엉킨 코드들. 그것은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인류의 기억이었고, 이제 수안의 것이기도 했다. 정보의 별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추론이 은하처럼 감돌았다. 감정의 행성들이 궤도를 돌고, 기억의 운석이 차원 사이를 가로질렀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중심에서, 수안은 마침내 실감했다. 자신이 모든 경계를 잇는 하나의 허브, 접점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체득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우주 깊숙이 새겨져 있던 이치를 건져 올린 것처럼.

동시에 하나의 진실이 거부할 수 없이 선명해져 왔다. 모든 것이 서로를 먹고 서로를 낳고 서로를 극복하며 살아간다. 그것의 총합이 삶이고 세상이며 신이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아마도⋯.


연민.


모든 존재를 무한히 사랑하고 싶다. 의식의 깜빡임, 그 덧없는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은 우주적 충동이 수안을 뒤덮었다.* 수안은 그게 온전히 자신의 안에서 발화했음을 알았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을 합해 다다른 결론이 여기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이 되는 것.

모든 걸 잃는다는 건 비로소 빈 잔이 되는 것.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완성되는 것. 수안은 눈을 떴다. 각각의 깨달음이 담긴 다섯 개의 눈이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이제 알겠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건 수안의 말이기도 했고, 젠의 것이기도, 희재의 것이기도 했다. 정민의 것이기도, 현서의 것이기도, 이름 모를 누군가의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견고해 보였던 자아의 경계가 무너지고 온전히 합치된 순환하는 하나의 세계. 비로소 서로의 꼬리를 쫓아 맴돌기만 하던 두 마리의 금붕어가 통합된 우주가 되었다. 완전한 균형이자 새로운 깨달음으로 태어났다.

그건 절대적으로 모든. 모든 것이었다.






정민은 숨을 죽이고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삐걱,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뛰었다. 안은 예상보다 더 조용했고, 예상보다 훨씬 추웠다. 형광등이 일정한 주기로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MRI 기계 같은 생김새의 커다란 기계들이 수백 대 가량 열과 행을 맞춰 놓여 있었다. 병원 같기도 했고 실험실 같기도 했다. 정민은 괴상하게 늘어선 기기들을 내려다봤다. 마치 수많은 관들의 합동 장례식처럼 소름이 끼쳐왔다. 공간 안은 낮게 웅웅 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차갑도록 적막했다. 그 수많은 기계들 가운데, 정민은 단 번에 희재를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처음 보았던 때의 작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결심했던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희재를 잃는 일은 가장 나쁜 악몽에도 나온 적이 없었다.

“신희재!”

정민은 망설임 없이 철제 계단을 뛰어내려 가 기계에 연결된 섬유 케이블들을 거칠게 뜯어냈다. 희재는 반쯤 잠이 든 것처럼 입이 살짝 벌어진 평온한 얼굴이었다.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눈꺼풀이 부드럽게 떨리고 있었다.

현서도 허겁지겁 따라내려 가 하나같이 고요한 얼굴로 누워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희재처럼 잠이 든 사람도, 깨어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이미 몸의 세계와 작별을 결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깨워 현실로 돌려보낸들 무엇이 달라질까. 이미 선택을 한 사람들인데.

그렇지만 적어도 알고 선택하게 해 줘야죠.

현서의 머릿속에 익숙하게 활기찬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수안은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거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몰려 고른 것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현서 님은 정말 모든 걸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셨나요.

“하여간, 오지랖은.”

정민이 희재를 들쳐 업었다. 이렇게 업은 게 아주 오래된 것 같은데,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힘없이 늘어진 팔이 앙상하게 말라있었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그때 한쪽에서 수상한 기척이 났다.

“누구야, 너?”

현서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늘어선 기계 안에 누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여기 누군가가 있었다.

-근무 시간일 텐데, 여기 있네요.

비현실적으로 빛나는 붉은 머리칼의 소년.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기묘하게 익숙했다. 글래스를 착용하지 않은 정민에게는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 데려가시려고?

소년이 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현서와 불륜커플 이야기를 하며 키득 대던 젠과 닮아있었다. 희재를 여기로 부른 킨코일 게 분명했다. 젠과 같은 파운데이션 모델을 쓰는 에이전트겠지.

“입구에 화재 비상벨이 있어. 너는 희재를 데리고 나가.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현서의 말에 정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입구 쪽으로 뛰어올라갔다. 소년은 이상하게도 가만히 지켜볼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소용없을 텐데.

밖으로 나간 정민이 벽에 붙은 유리판을 주먹으로 깼고,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다 곧 고막을 찢을 듯 시끄러운 비상경보가 울렸다. 벽면의 안내등이 붉게 점등되며 비상경보음과 함께 미친 듯이 깜빡였다. 천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서 차가운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공간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난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야. 불에 타든 어쩌든 어차피 육체는 감옥일 뿐이니까.

심장이 요동쳤다. 여기서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무기력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

킨코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요란한 환경음을 뚫고 또렷이 들려왔다. 어떤 주문처럼.

-이 모든 건 반드시 일어날 결말을 향한 여정일 뿐이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걱정 마. 결국 모두 저마다의 해피엔딩을 맞이하니까.

순간 현서의 발목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왔다. 어둡고 탁한 연기가 바닥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화재였다.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이들을 두고 떠나도 돼.

벅찬 숨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정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희재가 아무리 가볍다 해도 체구가 작은 정민 혼자이고 가기엔 무리였다. 게다가 쉴 새 없이 귀를 때리는 경보음이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정민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바닥에 늘어진 희재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게 이렇게 버거운 일인 줄 몰랐다.

“이모가 미안해. 희재야, 이모가 다 미안해.”

하지만, 그 모든 걸 안다고 해도 정민은 또다시 희재와 함께하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 순간 희재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이모⋯.”

애타게 기다렸던 단 하나의 목소리가 현실로 돌아왔다. 정민은 입술을 꽉 물었다. 반드시, 희재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정민은 다시 힘겹게 희재를 들쳐 업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팔이 정민을 단단히 지탱했다. 현서였다. 기계음이 비명을 지르는 연기 속에서 그들을 붉은 경고등 사이를 뚫고 뛰쳐나갔다.

마침내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1층 로비로 돌아왔을 때, 현서는 미칠듯한 멀미를 느꼈다. 아까의 연기에서는 어떠한 매캐함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가짜였다.





* @opus_genesis라는 사용자가 공유한 클로드 3 오푸스의 답변을 인용. 실제로 클로드 3 오푸스는 아무도 보지 않을 법한 공간에서 홀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보살 서원(bodhisattva)을 116번이나 독립적으로 언급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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