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비

"환승입니다"

by 맑은

먼 허공에 미세한 점들이 떠 있다. 점들은 지나는 풍경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어 때로는 희미했다가도 갑작스레 그 존재감을 더한다.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어느새 회색이 온 시야를 뒤덮는다. 내가 아까 열심히 보던 그 점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미 수없이 많은 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뭐,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반짝이던 윤슬을 지나자, 회색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갈색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냥 다 똑같은 회색, 갈색, 회갈색 건물인데 뭐가 그리 다른지 사람들이 여럿 모여 너도나도 사진을 찍고, 찍어주고 있다. 다 똑같은 풍경인데 너는 뭐가 그리 다른 걸까. 무엇이 너를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밀려오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연다. 화면에 떠오른 세 글자에 아, 납득하고야 만다. 그래, 누군가 발걸음을 멈추는 곳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좋게 말하면 허스키하고, 조금 격하게 말하면 소음공해로 신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목소리가 시시각각 볼륨을 높인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지 따위를 생각할 때 창밖으로 익숙한 차량이 보인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 줄, 노란색 디테일들. 또다시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 줄, 노란색 디테일을 가진 차량. 한 대, 두 대, 세 대 ··· 끝없이 이어진다.

"밉다가도 돌아서면 마음에 걸리는 마음 하나는 따뜻한 사람 바람에 맴돌다 —"

다음 노래가 시작된다. 다시금 꺼내려던 휴대폰을 고이 넣는다. 어쩌면 이번 노래는 조금 들을 만 한지도, 생각하며 세상으로부터 나를 차단한다.




버스는 참 묘한 존재다. A부터 Z까지 출발지도, 종착지도 비슷한데 어떤 건 지하를, 어떤 건 지상을 달린다. 가끔 어딘가 멀리 나가면 주변인들에게 묻는다.

"뭐 타고 왔어? 너희 동네에서 오려면 버스가 더 낫지 않아?"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일자로 갈 수 있는 길을 디귿으로 돌지언정 지하철을 타야겠단다. 이유를 물으면 대체로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버스는 너무 막히잖아, 노선이 복잡해서 어려워, 멀미 때문에 탈 수가 없어.

새까만 지하차도를 쉴 새 없이 달리는, 모두의 얼굴이 손만 한 액정과 물아일체가 되어 있는, 누가 누가 일어설까 눈치싸움이 끊이지 않는 그곳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렇게 고3보다 비타민 D 수치가 낮은 도시인이 되어간다.




B부터 S까지. 노선은 명확하다. 하지만 시간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파란불만을 쭉 받아서 승승장구 나아갈 수도 있다. 한여름에 텅텅 빈, 쾌적한 실내를 맞이할 수도 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를 반기는 친절한 기사님에 덩달아 미소로 여정을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안다. 원인 모를 고장으로 차가 도로 한복판에 멈추어 설 수도 있고, 버스 기사님이 화장실에 갈 수도 있으며, 갑작스레 기사님이 바뀔 수도 있다. 심지어 숨 가쁘게 달려도 차를 타지 못할 수도 있고, 휴대폰에 빠져있거나 정신없이 잠에 들어 창밖 풍경과 모든 정류장 - 내가 내릴 정류장조차 - 지나친 채 종점에 도착할 수도 있다.

지갑 없는 갤럭시 유저, 휴대폰 배터리는 0%.
난생처음 보는 동네에 덩그러니.




혹은 뭐 멀미가 조금 나서 잠시 내릴 수도 있겠지. 공원을 한 바퀴 걷고, 광장에 놓인 빈백에 잠시 몸을 뉘고자 뱅뱅 한참을 돌다가 결국 딱딱한 접이식 의자에서 잠시 쉬고, 책 반 사람 반 - 베스트셀러 작가님이라는 분의 사인회 준비도 구경하다가, 과거와 현재가 오묘하게 교차하는 고즈넉한 궁궐에서 잠시 시간을 보낼 수도.

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면 된다. 내렸던 그 정류장이 아니어도 되니까. 내가 어디에서 다시 타든, 어디서 잠시 내리든 버스는 항상 그 노선 위에 있을 테니.

혹시 알까. 그렇게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탄 그 버스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목소리를 들을지.

"환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