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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리 Nov 22. 2017

죽음과 삶

小訴한 기록8_죽음과 삶

1. 오스트리아의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죽음과 삶>은 영원한 존재와 삶과 죽음의 회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클림트의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이 황금빛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죽음과 삶>은 진녹색으로 채색되어있다. 진녹색 배경 속에서 사람들의 무리를 바라보는 망령의 미소 짓는 모습은 그 누구도 죽음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 뭉텅이로 뭉쳐져 있는 것 같은 그림 속의 사람들 무리는 어린 아기부터 늙은 노인 까지 남녀노소가 모두 표현되어 있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던 우리의 옛말처럼 누구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죽음의 공포를 보여준다.

클림트, 죽음과 삶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류 역사 이래에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이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 낸 이유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원시의 인간은 자연에 비해 매우 나약한 존재였다. 당시로서는 증명할 수 없었던 각종 자연현상 앞에 굴복해야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차츰 자연을 이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지배하게 되면서 자연적 위협에 의한 죽음의 공포는 감소하게 되었다. 급기야 과학이 발전하면서 영생에 대한 과감한 실험적 욕구도 증가하고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시신, 혹은 죽기 직전의 상태가 냉동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후대에 과학이 발전하면 자신이 생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설령 후대에 과학이 발전해 영원히 사는 삶을 누리더라도, 영토의 확장 없이 살아있는 자들의 생의 지속으로 인해 인구만이 증가한다면 순리를 거스른 대가로 결국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모두가 맞이할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죽음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한 개인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 관계 맺음을 한 구성원의 사라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회화 과정과도 유사한 것이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이 공동체의 삶을 함께 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면, 죽음에 대한 이해과정은 공동체의 삶을 정리할 때를 대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 의미에서의 죽음은 자신의 삶의 마무리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사람은 인간다울 권리와 자격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에 대해 만족감을 갖고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노인이나 중환자의 경우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한 예견이 가능한 입장에 놓여있다. 죽음이 가까워 온 사람이 공포로 물든 채 시들어가는 것 보다는. 자신의 생을 반추하며 아름다운 말년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도적인 차원에서도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죽음에 대한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해는 이처럼 근본적으로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면 대부분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죽음은 반드시 일정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떠나갔다는 슬픔의 감정이겠지만, 그 죽음이 가져오는 효과는 때로는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다. 죽음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라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행복해하는 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죽음은 분명 슬픈 것이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구절처럼 살아남은 이들이 이를 또 다른 삶의 자양분으로 삶고 극복해 나갈 것인지, 혹은 구성원의 죽음으로 인한 공포와 슬픔 속에 잠식될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그 죽음보다 그 죽음 이후가 더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아직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다른 이들은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죽음을 부르는 그릇된 이해는 20세기 중반 헝가리의 연쇄 자살 사태를 불러일으킨 노래<gloomy Sunday>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자살 교향곡이라 불리는 이 노래는 1935년 두 달만에 187명을 자신의 선택에 의한 죽음으로 이끌었다. 불안한 시대적 요인에 덧붙여 잘못된 감성의 자극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것이다. 연예인이나 이름난 공인의 자살사건 이후에 자살률이 일시적으로 급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죽음이 가진 전염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전염성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조앤 롤링의 소설 <해리포터>시리즈에서 주인공인 해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극중 악인을 ‘그 자’라고 부른다. 악인으로 나타나는 볼드모트라는 등장인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해리는 유일하게 볼드모트를 이름으로 직접 호명하는 자이며, 동시에 그를 물리치는 사람이다. 우리 앞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고, 이를 직시할 수 있을 때 동시에 우리는 그로 인한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2. 인간이 불멸 혹은 영원한 삶을 사는지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아무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멸이 존재하는지도 증명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불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불멸은 실제로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믿음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인간의 불멸성과 영원한 삶>에서 언급하듯 인류는 전통적으로 불멸에 대한 환상을 지녀 왔고, 현 생에서의 삶이 전생에서부터 연결되는 것이며 이승을 넘어 저승으로, 그리고 또 다시 다음 생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생에 대해 가지는 본능적인 애착의 표현이며, 동시에 삶과 죽음에 대한 극복 의지이기도 하다. 생에 대한 애착이란 자신의 생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며, 이는 현생에서의 삶이 끝나도 또 다른 삶으로 다시 생의 불씨를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불멸에 대한 열망이 삶과 죽음에 대한 극복의지라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과 죽음이 불멸이라는 동시 적용 가능한 대안을 갖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 대부분은 현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욕심과 불만의 표출은 감정을 가진 인간의 본능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실적 삶의 극복을 위해 현생과 이생을 나누고 자신의 불행에 대한 보답을 이생에서 찾으려 한다. 그것은 보장되지 않은 보상이지만 불멸에 대한 믿음만 가진다면 누구든 꿈꿀 수 있는 손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월요일 아침 로또를 구매한 사람이 토요일의 추첨시간까지는 억만장자를 꿈꿀 자유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이는 죽음의 극복이기도 한데,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갖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죽음이 끝이 아닌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불멸성에 대한 믿음은 그 사실성 여부에 있어서는 비록 증명될 수 없지만, 그 믿음 자체가 인간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도록 움직이는 여러 주요 요인 가운데의 하나가 불멸성이기 때문이다. 불멸에 대한 열망은 삶에 대한 애착의 표현이며, 연속적 삶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는 우리 삶에도 녹아들어 있는데 한국 전통사회에서는 대표적인 것으로 불교의 윤회사상을 들 수 있다. 우리는 현생에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에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짐승을 학대하는 사람에게 ‘다음 생에 저 짐승으로 태어나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전생과 이생의 연결고리 속에 현생이 존재한다고 보는 사상이 일반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생의 삶을 구속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생에 대한 믿음은 현생의 삶을 보다 신중하고 소중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는 자신이 현생에서 살았던 삶의 태도가 다음 생으로 연결된다고 믿기 떄문이다. 


 실제로 한 인간의 삶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으로 연결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제 인류의 삶에서 탄생과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동일한 영혼의 탄생과 죽음의 반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인간 사회는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불멸하다는 믿음은 인류 공동체가 연속성을 갖고 살아가는 데에도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생명이 일회적인 것이든, 지속적인 것이든 사회가 그것을 연쇄성을 가진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그 삶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개인이 다음 생을 위한 업을 쌓을 때, 다시 그 개인이 환생하지 않더라도 새로 태어난 생명이 그 업의 혜택을 받아 윤택한 삶과 생명을 이어 나간다면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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