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소한 삶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멜리 Nov 14. 2017

수능단상

小訴한 기록7_수능날의 기억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고 새벽 공기에서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수능 소식이 들려온다. 대학 내내 일이나 봉사활동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탓에 수능은 나를 꽤 오랜 시간 따라다녔다. 2010년도 수능을 치른 수험생이었던 나는, 무려 01년 수능 기출부터 15년 수능 기출까지. 15개년치의 수능과 함께했다.


 2009년 11월 12일 목요일 새벽 여섯 시. 일찌감치 눈을 떠 늘 먹던 아침을 챙겨 먹었다. 교복 위에 후드를 입고 그 위에 다시 코트를 껴입고 집을 나섰다. 손에는 아빠가 싸 준 점심 도시락을 쫄래쫄래 들고서 평소에 타지 않는 낯선 번호의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 나를 수능 시험장으로 데려다 줄 초록색 마을버스. 귀에는 영어 듣기 평가 파일을 재생시켜놓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오늘이 수능 날이구나. 전날 미리 와봤던 수험장 앞에 도착하니 기분이 묘했다. 학교 후배들과 재수학원, 음식점 등에서 나온 사람들이 몰려들어 먹을 것과 핫팩 같은 것들을 손에 잔뜩 쥐어주었다. 핫팩 봉지 하나를 까서 흔들며 교실에 들어갔다. 일찍 도착해서 그랬는지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 배치표를 더듬어 교실 정 중앙의 내 자리를 찾아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어제 학교에서 챙겨 온 삼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수면양말까지 꺼내 덧신고 책상에 앉았더니 평소와 같은 고3 내 모습이었다. 8시가 지나 휴대폰을 전부 제출하고 1교시가 시작되었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언어영역에 듣기 평가 다섯 문제가 있었다. 듣기 지문을 시작으로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능시험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축복받은 수험생이었다. 수능이 있던 11월이 되기도 전에 수시를 썼던 대학 중 한 군데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고, 다른 대학 두 군데에서도 수능 최저 기준 조건부 합격통보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늘 1등급을 맞던 과목이 두 개나 있었고, 상대적으로 쫓기는 마음 없이 시험을 치를 수 있었기에 고등학교 3년 동안 봤던 모든 모의고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3년이 내내 행복했느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닌 것이라. 고3 시절 나는 새벽 한 시까지 독서실에 다녔다. 3년 내내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수학이었다. 그때는 수리영역이었는데, 늘 1등급을 맞던 언어나 사회탐구, 못 봐도 2등급은 나오던 외국어와는 달리 수리는 6등급, 7등급까지 치닫기도 했다. 수학엔 전혀 머리가 없는 전형적인 문과생이 바로 나였다. 고2 때까지는 아예 수학은 포기하다시피 했고, 스스로 수포자이기를 자초했다. 그러다 고3으로 넘어가는 고2 겨울방학, 진짜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그제야 수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전범위를 다 처음부터 커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최소 3등급만 맞겠다는 심정으로 파트별로 쪼개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꽉 막힌 독서실 책상 벽을 보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문제를 보면서 나 자신을 얼마나 많이 책망했던지. 여름이 되어 수시 논술을 준비하면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인문대학에서도 '수리논술'이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강, 이화, 중앙, 한양, 고려대의 다섯 군데 대학에 원서를 썼었는데 다섯 개의 대학 중 절반 이상이 수리 논술을 예고했다. 그냥 문제 풀기도 버거운데 서술형이라니, 참담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영어 듣기 평가 파일을 MP3로 들으면서 학교에 갔다. 7시부터 8시까지 혼자 PMP로 EBS 인강을 하나 보고, 8시부터 0교시가 시작됐다. 3교시가 끝나면 쉬는 시간 10분 동안 친구들과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먼저 까먹고, 4교시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 1시간 내내 또 EBS 인강을 듣거나 모의고사를 풀었다. 매일 사탐 모의고사를 두 개씩 뽑아서 40문제를 5개씩 쪼개 8개씩, 8번의 쉬는 시간 동안 나누어 풀었다. 10시까지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하던 야자를 하고 독서실로 하교했다. 밤 열 시 반쯤 독서실에 도착해서 1시까지 공부를 하다 보면 독서실 창 밖 파라솔 밑에 앉아있는 아빠가 보였다. 나를 데리러 온 아빠 손을 잡고 집에 도착해 씻고 누우면 어느덧 새벽 두 시. 다시 여섯 시에 눈을 뜨기 위해 한시바삐 눈을 감던 그때. 심리적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가위도 몇 번 눌렸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가위에 눌리는 중이라는 것을 인지하고서도 곧장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그 수능이 무엇이라고 나를 그렇게 갉아먹으면서 살았나 싶은 순간들이다.


 고작 그 수능이 무엇이기에, 나의 고등학교 3년은 도시락과, 문제집과, 독서실로 끝난 것일까. 흔히들 대학에 가서는 진짜 친구를 만나기 어렵다고들 한다. 머리가 클 만큼 커서 만나 서로 계산하며 따지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나에겐 대학 때 만난 운명의 반쪽은 있어도,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운명의 반쪽 같은 절친은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소중한 친구들이 많고, 그중 누군가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서운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 서운하게 생각해준다면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만 같다. 그만큼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했던 기억이 너무 희미하다. 좋은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름 지역에서 공부 깨나 한다는 아이들만 모아놓은 학교였기에 성적 때문에 견제하고 서로 스트레스를 주던 친구들도 많았고, 정리해 놓은 노트가 없어지거나 문제집을 잃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수시로 대학에 붙은 이후로 쏟아지던 비난도 생생하다. 전교에 퍼진 말도 안 되는 루머의 진상을 찾아냈더니 내 앞에서 늘 나에게 고마워하며 내 요약 노트를 복사해가던 친구였던 적도 있었다. 도대체 뭐가 열일곱에서 열아홉, 그 쪼꼬맣던 여자애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오늘의 나는 이십 대의 시간 하루하루가 아깝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그때의 나라고 그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몰랐던 것뿐이다. 그 날의 하루하루, 지금 돌아보면 정말 빛났던 날들 모두가 80*40짜리 나무 책상 칸 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지나갔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사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많이 놓치고 살아왔다는 후회가 이제야 든다. 그렇게 목매지 않았더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낯선 의문.


 그럼에도 나는 대학시절 내내 아이들을 가르쳤다. 물론 늘 가르쳤던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얻기를 바랐다. '기왕이면'. 그러나 아니면 어떠한가? 아이들은 대부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 시절의 나도 다를 바 없었으리라. 분명 꿈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늘 학기초에 적어 내던 '장래희망' 칸 속의 꿈이었을 뿐 진짜 내 꿈은 아니었다. 나는 꿈도 없는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어른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선택지를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어느 날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드디어 찾아내게 되었을 때, 그 순간에 고작 성적이나 대학 나부랭이가 네 발목을 잡지 않게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둘 뿐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꽤, 짐짓, 어른처럼 잘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 또한 비겁한 변명이었다 싶은 것이 간사한 어른이의 생각이다. 열일곱의 내 발목을 '고작 성적이나 대학 따위'가 붙들어 맸다면, 스물일곱의 내 발목은 대체 누가 잡고 있는 것일까. 아마 서른일곱에도, 마흔일곱에도 또 다른 무언가가 내 발목을 채기 마련일 거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늙는구나 싶기도 하고, 뒤늦게 사춘기가 오는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용감했던 10대를 지나 나이의 가속도를 한 칸씩 높여가면서 핑계와 회의주의에 한 발쯤 걸치는 것이 속 편한 삶이라는 것을 얍실스럽게 깨달았는지도.


 작년 수능 철에 썼던 글을 뒤져보니 모든 수험생에 대한 애정과 응원, 모두 시험을 잘 보기를 바라는 바람이 담겨있더라. 하지만 올해만큼은 아니다. 한끼줍쇼에 나왔던 효리언니가 말했다. 뭘 훌륭하게 사냐고, 그냥 아무나 되라고! 조금 바꿔 표현하자면, 아무나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나, 무엇이든, 그리고 그 과정에 수능이란 것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밟고 넘어 서기를. 그리고 필요하지 않다면 과감히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기를. 아무나 되자, 아무나 될 수 있다. 누구도 아무나 무엇이든. 나 역시 내가 바라는 삶 앞에서 '고작 이것 따위 들'에 붙들리지 않는 매일이기를.


jtbc 한끼줍쇼, 이효리



매거진의 이전글 나 편하다고 좋아해서 미안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