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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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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리 Sep 27. 2018

물파스보다 빨리 끝나버린 관계의 유통기한

그때 산 물파스는 아직도 괜찮아서 2019년까지 쓸 수 있더라

 올여름엔 날이 하도 더워서 모기도 다 타 죽었는가 보다 할 정도로 코빼기도 안보이던 모기들. 여름 내내 감감무소식이다가 날이 서늘해지니 어디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온다. 살성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스무 살 무렵부터는 모기에만 물렸다 하면 손바닥 만하게 부어오르기 일쑤. 다리에 두어 방, 팔에 한 방 콱콱 물렸는데 또 살갗이 퉁퉁 부어오르고 화끈댄다. 벌겋게 부어올라 딱딱히 굳은 모기 물린 자리에 뭐라도 발라야겠다 싶어 서랍장을 뒤적였더니 통이 잔뜩 지저분해진 물파스 하나가 딸려 나왔다. 엥, 뭐야 이거 발라도 되는 거야? 싶어서 거꾸로 뒤집어 보니 유통기한이 아직도 남았다. 2019년 2월 17일까지.

 

 물파스를 샀던 그날도 나는 모기에 물려 퉁퉁 부은 허벅지를 쥐고 아파하고 있었다. 허벅지 뒤를 물렸는데, 물린 자국이 점점 부어 올라 둥그렇게 퍼지더니 다리를 감싸고 서로 만날 지경이 됐다. 긁으면 아프고, 긁지 않으면 가려워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차에 태워놓고 편의점에 뛰어가 물파스를 하나 사다 줬었다. 강아지를 안아 들고 차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봤던 그 날의 고가 밑 길가의 풍경이 생각난다. 그날의 모기 자국도 엄청나게 컸었고, 그때 분명 그 넓게 퍼진 붓기에 잔뜩 발라 댔었는데 말이지? 이상하다. 물파스를 흔들어보니 아직도 찰랑찰랑 반절도 넘게 남은 모양이다.


 그해 여름의 모기들이 하나 둘 계절 앞에 사그라질 때쯤 우리의 관계도 떨어지는 수은주의 눈금같이 떨어져 내렸다. 감정도, 기억도, 감각들도 빛바랬지만 때아닌 물파스 같은 것이 튀어나와 우습다. 지나간 사랑과 관계를 애달프게 하는 편지나 사진 따위가 아니라 물파스라니. 감정은 촉촉하게 해주지 못해도 일단 지금의 내 상처는 촉촉하게 해주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많은 것들이 지나갔고, 변했고, 내 마음대로 구겨 넣고 재단해 추억으로 포장한 기억들만이 남았지만 오늘 밤은 남은 것이 감사한 밤이다. 아직 그 관계의 산물 중 나의 상처를 보듬어 줄 유통기한이 남아있음에 감사하는 밤. 그리고 그것이 비릿한 눈물자욱이나 아쉬움에 터지는 어설픈 한숨 같은 것이 아니라 뜻밖의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가벼움일 수 있음에 감사하는 밤이다.


 모든 것엔 유통기한이 있다. 변치 않겠다 했던 약속이 가장 먼저 떠나고, 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것들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유치원 소풍에 가던 날, 아빠가 사 준 반지 모양 보석 사탕이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봉지도 까지 않고 잃어버릴까 손에 쥐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저녁이 되어 집에 오고 나서야 사탕 봉지를 열었는데 사탕이 내 손에서 조금 녹았다가 굳었다가 하면서 이상한 모양으로 변해있었다. 원래는 보석 모양으로 각지게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변해버린 반지를 보며 속상해 울음이 났었다.


 애써 놓치지 않으려 손에 틀어쥔 것들은 제 모습을 잃고 어차피 망가져 버리기 마련이다. 남을 것은 자연히 남고, 갈 것은 자연히 간다. 바람이 슬슬 불어오는 언덕 앞에 놓인 잡동사니들처럼, 가벼웠던 것들이 먼저 날아가 자취를 감추고 좀 더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근방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가끔 발에 채이기도 하고 맘을 흔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불어오는 바람에 결국엔 날아가 버릴 것들이다. 뜬금없이 내게 남은 것은 벌레 물린 자리에 바를 물파스. 남겨둔 것인지, 남아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일은 약국에 들러 새 물파스를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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