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 집은 아차산 앞에 살았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후문이 바로 앞이라 자주 대공원을 들락거렸다. 세네 살 정도의 어린 때라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토끼, 사슴, 공작새 같은 동물들을 보았던 잔상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아빠 손을 잡고 대공원을 걷던 순간들이 퍽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어서 그 이후에도 소풍이나 견학 등으로 동물원이나 대공원에 가게 되면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 자라고 난 뒤에는 대공원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놀이기구를 좋아하지도 않고, 이젠 그런 곳을 함께 데이트할 남자 친구가 없어지면서 정말 갈 일이 없게 됐다. 그래도 종종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하늘이 높아지고 바깥의 날씨가 유난히 화창한 날엔 동물원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이제 확실히 안다. 나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무지몽매하고 잔인한 것이었는지. 그제 저녁에 대전의 동물원에서 퓨마 한 마리가 사살당했다. 8년생 암컷 퓨마는 2010년 서울대공원의 철창 속에서 태어나 대전 오월드의 철창으로 옮겨진지 5년째 되던 해, 의도치 않게 잠깐 바깥바람을 쐬게 된 그날 총에 맞았다. 누구든 '한국산 퓨마'를 생각해 본 일이 있을까. 한국에서 나고 자라 죽은 ‘퓨마’라니. 브랜드 이름부터 떠오르는 퓨마는 그 로고 때문인지 어쩐지 검은색일 것만 같았는데, 사진을 보니 금귤 색 같은 고운 털을 가진 녀석이었다.
모든 것은 저마다 이름이 있고, 우리는 이름을 들으면 그것이 가진 속성들을 떠올린다. 퓨마라는 이름엔 맹수라는 호칭이 어울리고, 푸르른 초원과 힘차게 뜀박질하는 생동감 넘치는 풍경이 따라오듯 떠오른다. 하지만 8년 동안 철창 밖을 넘을 수 없었던 뽀롱이에겐 그 무엇도 어울리지 않는다. 어쩐지 그 이름조차 조롱처럼 느껴진다. 철창 안에 갇혀, 평생 푸른 초원은 구경조차 하지 못한 귀여운 맹수에게 붙은 귀여운 이름.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뽀롱이를 박제로 보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다. 기가 차는 밤이다. 죽은 퓨마의 생전 모습은 한껏 살이 오른 모습이었다. 야생성이라곤 하나 없는, 덩치 큰 집고양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 어쩌다 사육사의 실수로 열린 채 방치된 문 사이로 빠져나갔다가 사람들에게 쫓겨 죽음을 맞이한 낯선 이국땅의 퓨마. 그리고 이제 죽어서도 썩지 못하고 몸 안을 더 낯선 것들로 채운 채, 살아생전보다도 더 맹수 같은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영원히 굳어갈 운명이 되었다.
다신 동물원에 가고 싶다는 어리석은 말 따위를 입에 담지 않겠다. 모든 것에 이름이 있듯, 모든 것에는 알맞은 자리가 있다. 다시는 철창이나 유리벽 안에 감금된 그 어떤 생명에게도 예쁘다, 귀엽다, 신기하다는 말 따위를 올리지 않겠다. 나 스스로의 잔인함과 무지함이 더없이 미운 날이다. 죽은 퓨마가 설령 자유나 존엄 같은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이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인간이라면. 우리는 그 잘났다는 '인간'이니까. 준비되지 않은 채 발생한 상황에 사살이 불가피 한 선택이었다면, 그 이후의 박제에 대한 논란은 준비되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격이라고 밖에 평할 수가 없다.
안녕, 다시는 동물원에 가고 싶단 말 따윈 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