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엔 새태를 만났다. 매번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앓고 앓다가 드디어 실물을 영접. 어떤 강아지가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냐만은 새태는 특히 더하다. 부숭부숭한 털에, 달큰한 꼬순내. 간식을 쥐어 들면 ‘손’을 외치기도 전에 번갈아 가며 자신의 양 손을 내어준다.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멍뭉이들. 초등학생이던 시절, 강아지가 너무 갖고 싶어 여러번 엄마아빠를 졸라댔었다. 엄마는 내가 처음 키웠던 하얀 강아지가 하늘나라에 갔기 때문에 더는 키울 수 없다고 얘기했다. 어린 나에게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생명도 죽을 수 있다는게 충격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론 강아지를 키우겠다 조르지 않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것이 흰색 털의 강아지 인형을 말했던 것임을 알게되었다. 이사를 가며 강아지 인형을 잃어버렸을 뿐이었는데, 내 고집을 꺾기 위해 엄마가 내 어렴풋한 기억을 이용했던거다. 그때까지 나는 나의 첫 강아지는 희고 조그마한 녀석이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사실은 AA건전지 네 개로 왕왕대는 인형이었다니.. 그때의 그 배신감이란.
그 후로도 종종 강아지를 키우자, 고양이를 데려오자 얘기했었지만 아빠의 말에 마음을 접었다. “데려오는건 좋은데, 걔 의사는 물어봤어? 걔도 너랑 살고 싶대?”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몸뚱이 하나 간수하기 어려운 나에게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함부로 결정해서도, 쉽게 생각해서도 안되는 일.
매일 밤 잠들기 전 인스타와 유튜브로 고양이와 강아지 보는 시간을 꼬박꼬박 가지면서도 가족으로 들이는 것을 늘 주저하게 된다. (요즘의 최애는 역시 절미..T_T)나의 욕심에 상처받는 누군가를 만들까봐. 혼자 살고, 집에 없는 시간이 더 긴 사람과 함께 사는 반려동물의 외로운 삶을 강요할까봐.
물론 바쁜 생활 가운데에서도 가족이 된 동물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붓는 사람들도 많다. 언니는 유기견이었던 새태를 가족으로 맞아 예쁘고 사랑스러운 새태의 본래 모습을 찾아주었고, 갑작스러운 묘연으로 지난해 말 냥이를 모시게된 친구도 세상에 둘도없이 훌륭한 냥집사가 되었다. 친구는 냥이를 가족으로 맞은 다음부터는 평소보다 배로 열심히 청소를 하고, 집에 먼지 쌓일 틈이 없게 산다고 한다. 먼지들이 냥이 건강을 해치기라도 할까봐 손닿지 않는 곳까지 치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단다.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일은 너무 어렵다. 사서 하는 걱정이 심한 타입인 나에게는, 만남이 있기도 전에 이별이 걱정이다. 때로는 무지개 다리를 건넌 것이 아닌데도, 이제 만날 수 없게된 고구마를 좋아하던 강아지가 하염없이 그리운 날도 있다. 이러한 수준인데, 하물며 진짜 내 뽀시래기와의 이별이라면 나는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렇지만 새태를 만나고 온 그 주말 밤, 우스갯소리로 친구와 함께 언젠가 만나게 될 강아지의 이름을 지어줬다. 언젠가는 나의 두려움을 깨고 우리집에 털복숭이를 들이는 날이 오겠지. 그날의 나에게는 이별의 두려움보다 털과의 전쟁이 주는 두려움이 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