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또 만나.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빠는 단 한 번도 내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아빠는 나 역시 전화를 재깍재깍 받기를 원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는 날에는 확인하면서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화를 내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지? 하는 고민들. 그렇게나 전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처음에는 낮잠을 자고 있나 생각했지만 세 통의 전화가 모두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자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빠, 왜 전화가 안 돼요?] 문자를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한 시간, 두 시간…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불안이 마음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평생 아빠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던 적이 없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아빠는 꼭 전화를 받아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무슨 일일까. 나는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아, 아빠가 전화를 안 받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아빠 얼마 전에 다리도 다쳐서 어디 멀리 가지도 못할 텐데 왜 전화를 안 받지?"
"우선 기다려봐, 내가 갈 때 까지도 안 받으시면 그때 어떻게 할지 생각 하자."
영은 우리 집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다급한 내 연락에 영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다정아.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기다려보자. 단호하게 말하는 영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괜히 불안을 키우지 말자. 나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영의 비행기 착륙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 아빠와 연락이 닿았다. 생전 카톡을 주고받은 적이 없어 마지막 메시지가 이년 전인 아빠의 카톡을 열어 보이스 톡을 걸었고, 아빠는 경쾌한 목소리로 왜 보이스톡으로 걸었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나는 아빠 전화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아빠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나 아빠한테 가야 하나 했잖아! 왜 전화가 안되냐구!"
공손하게 문자를 보내는 삼십 대 후반의 딸은 사실 아빠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버럭버럭 화를 내는 내 목소리에 아빠는 허허 웃기만 했다. 전화를 끊고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를 연신 외치다 나는 혼자 사는 나를 불안해하는 엄마와 아빠를 생각했다.
엄마는 매일 연락이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날엔 카톡으로 점이라도 하나 찍어 보내라고 했고, 아빠는 내가 다른 일을 하느라 전화를 잠시라도 받지 않으면 동생을 시켜 계속해서 전화를 했다. 전화는 수십 통씩 내가 받을 때까지 이어졌다. 뒤늦게 전화를 받으면 동생은 말했다.
"아빠가 누나 죽은 거 아니냐고 불안하니까 전화해 보라고 하잖아!"
신경질을 잔뜩 내는 동생에게 내가 죽긴 왜 죽어, 하고 아빠에게 다시 전화를 하면 아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이하게 전화를 받았다. 한두 통 못 받을 때는 화를 버럭 내지만 긴 시간 후에 연결될 때는 늘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였다. 괜히 화를 냈다가 내가 삐뚤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아빠에게 나는 아직도 어린 다정이다. 우울로 오래 고생하던 딸, 수북이 쌓인 약통들을 아빠는 애써 모른 척했다. 우리 집에 오면 영양제 통 하나를 봐도 이게 뭐냐고 꼭 묻던 아빠지만 그 약통들 만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옆에 두고도 눈을 돌리던 아빠. 표현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걱정들. 아빠는 그렇게 내 생사가 늘 걱정이었고 그 불안을 해소할 것은 전화였다.
이렇듯 멀리 있는 자식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방법은 전화뿐이라 전전긍긍하던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 날,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영을 만난 것은 삼 년 만이었다. 나는 늘 그랬듯 영을 보자마자 포옹을 했고, 영은 슬링 백에 담겨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지냈냐고 물었다.
"아빠 연락 됐어! 괜한 걱정을 했지 뭐야."
"것봐, 내가 뭐라 그랬어,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
이럴 때 나는 그녀가 언니처럼 느껴진다. 감정의 높낮이가 크고, 쉽게 놀라고, 쉽게 겁먹고, 쉽게 행복하고, 쉽게 우는 나와는 다르게 늘 평온한 사람. 나는 그녀의 차분함을 좋아한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신나게 떠들었고 영은 간간히 고갤 끄덕이고 간간히 소리 내어 웃었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하나였다. 함께 밥을 먹는 것. 그리고 함께 쉬는 것.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있냐는 영의 말에 나는 함께 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한때는 같이 살았고, 어떤 때는 한 동네에 살며 함께 밥을 먹는 일이 무척이나 익숙했던 우리는 멀리 떨어져 각각 살게 되며 혼자서 밥을 먹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함께하는 식사가 가장 그리운 것이 되었다.
우리는 목요일부터 영이 돌아가는 일요일까지 매 끼 같이 밥을 먹었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영은 혼자 살며 늘 불면에 시달리는 내가 그녀가 있는 동안 잘 자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고, 나는 네가 와 마음이 편안해 자꾸만 잠이 온다고 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어머어머 다정이 오랜만이네~ 영이 오랜만에 보지?"
"네, 삼 년 만에 만나요. 삼 년 만에 보니까 저희 둘 다 늙은 거 있죠, 아직 시집도 못 갔는데 흑흑"
"아휴 그러게 말이야! 너네도 늙는데 걱정이야!!!"
- 엄마, 하나도 걱정 안 되는 목소리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영의 말에 영상통화로 연결된 영의 어머니도, 나도 웃었다. 서로가 사는 생의 전반을 지켜봐 주는 관계, 언제 어떻게 서로의 가족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사이.
나는 이른 이십 대부터 파도가 많았다. 집안일이 끊임없이 있어 쉴 곳이 없었던 데다 연애는 더 지독했다. 나는 영에게 자주 털어놓았고, 많이 울었다. 그녀는 그런 내 등을 두드려줄 뿐 말이 없었다. 어떤 날은 어쩜 그렇게 살가운 말을 안 해주냐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네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에겐 집안 문제가 없었지만, 타지에 나와 살며 겪는 문제들이 꽤나 있었다. 주거의 문제나 외로움의 문제 등 여러 가지 것들이 동갑내기 친구인 나만큼이나 있었을 그녀는 매사에 크게 반응하는 나와는 다르게 혼자 가만히 끌어안고 소화하는 사람. 늘 안으로 처리해 냈기 때문에 영을 위로해야 하는 일들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어른이 되었고 서로의 성향을 더 잘 알게 되어 나는 늘 영에게 언제든 마음이 힘들 땐 우리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공간을 가지지 못하는 걸로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혼자 사는 내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내게는 영에게 할 수 있던 가장 큰 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보다 더 먼 거리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전화기에 그녀의 이름 석자가 떴다. 평소 문자가 익숙하던 우리였기에 전화가 온다는 건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다정아, 나 너네 집에 당분간 있어도 돼?]
- 응, 당연하지. 티켓 끊으면 알려줘.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마 후 티켓을 끊었다며 연락이 온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그날 영이 우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세상 즐거운 일도, 큰일 날 일도 없는 것 같았던 그녀의 울음에 사실은 당황했었다. 늘 울고 슬퍼하던 것은 내 쪽이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나는 괜찮다고, 새 직장 찾으면 되고, 너는 아무 생각 말고 우리 집에 와서 나랑 같이 지내고 싶은 만큼 지내면 된다고 했다. 그럴듯한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근사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매번 나를 다독이던 영은 정말로 큰 일을 하고 있구나, 그때 알았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집으로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는 방을 하나 내어 주었다. 그렇게 육 개월을 같이 살았고, 그녀가 새 직장을 찾으며 이사를 나갔다. 차가 없어 걸어서 출퇴근하던 영은 동네를 벗어나기 힘들어서 나는 금요일에 퇴근을 하면 늘 그녀를 데리러 갔다. 금요일 밤의 도로는 차들이 빼곡해 평소보다 귀가시간이 두 배는 길어졌지만 일주일 동안의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면 금방이었다. 저녁은 늘 외식이었는데 가끔 아빠가 우리 집에 올 땐 함께 요리를 해서 셋이 먹기도 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 그녀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면 그제야 한 주가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만남, 그리고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헤어짐. 그렇게 지내다 내가 멀리 이직을 하며 떨어지고는 각자의 삶이 바빠 자주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오래도록 그 시간들을 그리워했다.
[너 있잖아, 되게 많이 변했어.]
- 내가?
[응, 삼 년 전이랑 엄청 달라진 것 같아.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면 말투나 쓰는 어휘는 달라진 게 없는데 그 안에 있는 미묘한 기운이 달라졌다?]
- 오?
[나 있을 때 네가 막 칼림바도 보여주고 펠팅 한 것도 보여주고 여러 가지 취미들 보여주고 하면서 그랬잖아. 우울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온갖 걸 다 한다고. 근데 사실 너 몇 년 전에는 그러지 않았거든 울적하면 거기 매몰돼서 동굴에 들어간 것처럼 나오지도 않고 푹 잠겨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앓는데 난 그게 너무 불안했어.]
- 응.
[네가 정말 너를 일으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사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 노력들로 이제는 완전히 변화하는 시점에 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여전히 열나게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하고….]
- 호오… 그런가?
[힘든 이야기 할 때도 보면 힘들다, 로 끝이 아니라 원인도 찾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까지 이야기하는데 말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하는 사람인 걸 아니까, 알아서 끝까지 잘 맺음을 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싶어서 난 좀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너는 진짜 모든 걸 오롯이 혼자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렇게 됐구나 싶더라. 사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더 빨리 벗어났을 텐데 그럴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 어차피 사라지지 않을 일들은 다루면서 살아야 하니까,
[그치. 우리도 진짜 어른이 되려고 하나 봐.]
집으로 돌아간 저녁, 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이제는 걱정을 덜 해도 될 것 같다고. 혼자 사는 집에서 잠 잘 못 자는 것 말고는 너무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근래에 들은 말 중에 가장 기쁜 말이었다. 잘해 왔다는 말, 잘하고 있다는 말, 잘할 거라는 말. 너무 짜릿해서 더 들으려고 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댔지만 늘 그랬듯 영은 무미건조하게 ‘잘 지내는 거 봤으니까 안심하고 난 잔다’ 하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잽싸게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네가 있어서 참 좋아 영아!]
- 나듀!
어울리지 않게 나듀! 하고 외치며 외할머니 사진을 보라며 보내왔다. 그리고 이어진 가족들의 사진. 저마다 재밌는 얼굴과 포즈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안다. 많이 웃으라고, 아무 생각 말고 즐거워하라고 덤덤하게 내미는 마음. 어느 날은 말로, 어느 날은 우스꽝스러운 사진들로, 어느 날은 귀여운 것들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음을 밝혀준다.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 가장 친한 친구로 있으면서도 희망찬 이야기는 잘하지 않던 그녀에게서 들은 말로 배가 불렀다. 좋은 말, 칭찬, 너무 짜릿해!
생전 다정한 말이라곤 하지 않던 영은 삼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듀! 하고 귀여운 단어를 쓰게 되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내게는 귀여운 친구다. 사진을 찍어줄 때마다 어색하게 있으면 ‘어어!! 꽃받침 꽃받침!!!’ 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꽃받침 하는 나를 따라 환하게 웃으며 꽃받침을 하는 내 친구. 삼 년 만에 내 사진첩에 새로운 영의 사진이 담겼다. 가장 젊은 날, 아이스크림을 들고 환히 웃는 영. Forever,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