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외국인으로 살고 싶어

거 한국인끼리 너무 그러지 맙시다.

by Mel

이직한 지 1년 3개월 차. 슬슬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회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직장인이니 불만이 없을 수는 없지만 아직도 배울 것이 많고, 일은 나날이 힘들어짐과 동시에 재미있어진다. 하지만 프로 퇴사러는 어디 가지 못한다. 거기에 한국에 들어왔으니 1년 넘게 쉰 면접 감도 끌어올릴까 하던 차였다.


기가 막힌 시기에 링크드인으로 연락이 왔다. 잘 알고 있는 회사였다. 싱가포르에 아시아 본사가 있는 이 회사는 전 직장동료가 다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회사라고 익히 들어왔다. 한국지사에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에 두근거린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예스를 눌렀다. 이 금사빠는 바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는 잠깐 조용히 들어왔는데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연락했지?


링크드인 중독자답게 나는 한국지사 직원들의 프로필을 싹 훑었고, 이 인사부장이 토종 한국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인격형성을 마친 두 명이 영어로 메일을 주고받다니. 무척이나 피하고 싶은 상황이지만 상대방이 영어를 쓰는데 굳이 한국어로 대답을 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어색하게 영어로 1차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나는 평일 점심이나 오후 5시 이후라고 말을 했고, 그녀는 아침 9시 전에 하겠다고 다시 제안을 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이렇게 무시할 거면 애초에 왜 물어본 걸까? 이때부터 싸했다. 그녀도 배테랑이지만 나 또한 면접관으로 1년을 보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익히 짐작이 갔다. 빈정이 상했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 상함이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7년 전 한국에서 신입사원으로 면접을 보고 다녔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연봉을 얼마나 깎을 수 있는지를 물어본다. 내 연봉을 들은 그녀는 이 포지션에 지정된 연봉보다 내 현재 연봉이 높다며 낮춘다면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는지를 재차 물었다. 여러 번. 어느 누가 연봉을 낮출 생각을 하면서 면접을 본 단말인가? 그것도 전화 상으로 바로 말해줄 면접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묻기에 생각해보겠다고 했더니 나중에 메일로 알려주란다. 어느 정도까지 내릴 수 있는지.


이미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고 나도 준비한 질문을 쏴댔다. 그랬더니 갑자기 음소거 버튼을 누른다. 나는 전화가 끊겼는지 알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음소거 뒤에 답을 준비하고 다시 말을 하기를 여러 번. 정말 짜증이 났다. 그녀는 자꾸 음소거 버튼을 누르면서 연봉을 깎고 싱가포르 지사로 옮기란다. 나는 당신이 한국지사 포지션이라고 해서 면접에 응했던 건데.


이해는 간다. APAC 채용 전부를 맡고 있던 그녀는 마침 얻어걸린 한국인을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한국지사에 적합한 경력은 아니지만 마침 싱가포르에도 한국인은 필요할 예정이고 (지금 필요하지는 않단다) 없는 포지션으로 내 연봉까지 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지원한 자리도 아니오, 먼저 연락을 주셔놓고서는 상대방이 기분 나쁠 정도의 태도를 보여주다니. 오랜만에 한국에서 본 면접은 실망 그 자체였다. 뒤따라 든 의문은 '외국인한테도 이런 태도로 면접을 볼까?' '면접도 영어로 봤다면 분위기가 정말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외국인, 한국인과 섞여 일을 하다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한국인 타입이 있다. 한국인은 막 대하고 외국인들에게는 한없이 나이스 해지는 한국인들. 나의 고객사들 중에서도 안타깝게도 이런 분들이 있다. 나와 이야기할 때와 내 외국인 동료와 이야기할 때 이중인격을 보여주시는 분들이다. 일치감찌 나와 사수는 그들을 요주인물로 묶어 관리하고 있다. 물론 한 시간의 면접으로 그녀를 규정지을 수 없겠지만 오랜만에 경험해보는 한국 스타일 면접은 여러모로 씁쓸했다.


한국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싱가포르 친구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네가 외국인이라서 그래." 그들도 그들끼리는 무례하고 경우 없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독 외국인들에게는 친절해진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한류가 아직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동남아에서는 한국인이어서 덕을 보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 감사한 일도 많았고 현지 친구들과 느끼는 온도차도 꽤 크다.


그래서 터무늬 없이 외국인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와서도 외국인이고 싶다. 사투리까지 쓰는 나의 한국어를 듣고 외국인 대접을 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겠지만 외국인을 대할 때처럼 예절을 지키면서 서로를 존중해주는 사람들만 만나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나도 영어는 어렵지만 영어로 대화할 때처럼 예의바름만 지킬 수 있다면 한국에서도 영어로 일할 용의는 충분하다.


돌아갈 외국이 있다는 것에 서글프지만 감사하고, 한국에 있고 싶지만 돌아가고도 싶은 어정쩡한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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