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의 말이 다 맞을 때는?
멜입니다.
한국을 떠난 지 4일째 = 격리 4일째. 다행히 좋은 호텔이 걸려서 아름다운 뷰를 감상하면서 야근을 하고 있지요. 연초는 정말이지 너무나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가족들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쫓기듯 싱가포르로 돌아왔어요. 다행인 건, 너무 바쁘니 갑자기 없어진 가족들이 조금은 덜 그립다는 거예요.
제가 싱가포르 회사에 입사한지도 1년 반이 되어가네요. 저의 포지션은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고객관리 + 사업개발로 들어와서는 사업개발만 하게 되었다가 다시 고객관리만 하는 것으로 정해졌지요. 연말에 급하게 난 결정에 지금은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익히느라 재미있고 바쁘게 살고 있어요.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우선 저는 세일즈를 놔본 적이 없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오랫동안 공들여 따내는 계약은 짜릿합니다. 물론 다음 달 통장에 꽂히는 커미션도 감동이고요. 역량도 여기에 맞추어 개발을 해왔습니다. 꼼꼼함과 세심함보다는 결단력과 추진력, 그리고 타이밍 잡기로 살아왔어요.
이렇게 7년 넘게 세일즈를 해오던 제가 클라이언트 관리만 담당을 하게 됨으로써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물론 클라이언트 관리라고 해서 정말 '관리'만 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맞춰야 하는 타깃이 있기 때문에 어카운트들을 잘 키워서 돈을 더 뜯어내고 다른 상품도 팔아야 하는 세일즈가 남아있긴 하죠. 하지만 여기에서 필요한 역량은 사뭇 다릅니다. 많은 기관들의 수많은 사용자들을 관리하려면 꼼꼼함과 세심함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꼼꼼함이 부족한 저는 이 부분을 애써 잊고 지냈어요. 그저 이제는 사수와 업무가 완벽히 분리되었으니, 내 재량이 많아졌다는 것에 만족했죠. 그러다가 문제가 생깁니다. 기존 고객의 계약서를 새로 작성할 때의 일입니다. 보통 한 번 계약을 맺으면 재계약은 자동 갱신되는데, 간혹 다시 부탁하는 분들이 있어요.
변명이라면 올해부터 양식이 새로 바뀐 데다가 상품 구조도 바뀌어서 예시가 없었다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사소한' 실수를 3개 정도 남겼어요. 적어도 저에게는 사소했죠. 사수는 제 계약서를 보더니 이거는요? 저거는요?를 하기 시작했어요. 확 짜증이 나서, 조금 늦게 대답을 했더니 말없이 파일을 남기라고 한 후 새벽에 수정본을 다시 보내줬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전화가 와서 30분 동안 저의 실수에 대해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주니어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지적당하는 것이 분하고 짜증 났지만 다 맞는 말만 하는 사수. 꼬투리라도 잡고 싶은데 할 말은 없었어요. 좋든 싫든 저는 이제 시장을 총괄하게 되었고, 이런 실수는 신뢰를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은 묵직한 팩트로 저에게 날아왔어요. 예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들이 화살이 되어 쏟아져내렸습니다.
네. 네. 네. 만 반복했습니다. 할 말이 없었어요. 분하고 짜증 나지만 반박할 것도 없었고요. 통화가 끝나고 곰곰이 곱씹어보니, 제가 사수 입장이라도 같은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았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아니오, 다 알만한 사람이 이런 실수를 하는 것도 사수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겠죠.
우리는 프로페셔널하게 대처했고, 저는 치미는 분노와 짜증을 조용히 옆으로 치웠습니다. 이제 8년 차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했지만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고, 돌이켜보니 배울 부분이 많았어요. 사수 성격에 분명히 통화 전에 할 말을 정리하고 다듬었을 거에요.
그래서 중요한 업무를 할 때는, 사수의 약간은 격앙되었지만 정중한 목소리를 떠올립니다. 그러면 차분해집니다. 또 실수를 하면 그건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요.
기나긴 한국 휴가(라고 쓰고 재택근무만 세상 열심히 했던)를 끝내고 돌아온 싱가포르, 한 살 더 먹은 나이도 새로운 포지션과 새로운 집 모두 차분하게 시작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