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택 나의 인생
영화 '럭키'에서는 잔인한 킬러 (유해진)가 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넘어지는 바람에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하루아침에 무명배우의 삶을 살아간다는 설정이 재미있었다. 무겁지 않은 액션 코미디가 내 취향이지만 사실 기억상실증은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특히 기억상실증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해리성 장애 - 그중 해리성 둔주는 워낙 극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갑작스럽게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 흥미를 끌기에는 제격인 것이다. 보통 충격적인 사건으로 발현되며 거주지를 이탈하거나 계획에 없던 여행을 떠나 바뀐 정체성으로 전혀 다른 삶을 꾸리게 된다.
르네 젤위거 주연의 '너스 베티'가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실종, 행방불명으로 끝나는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결말로 마무리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지로 거주지를 이탈하여 전혀 다른 친구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면? 이전의 나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나를 그 위에 덧칠할 수 있다면?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센터장인 최인철 교수는 그의 책인 '굿 라이프'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장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친숙한 환경에서 비슷한 사람들과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예측 가능한 세상이 주는 안락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도시의 공기'가 없다. 중세 농노들이 도시로 도주하거나 이주하여 느꼈던 자유와 경쟁과 개성의 공기가 없다. 파격을 꿈꾸고 새로운 사상에 마음을 여는 것을 장려하는 공기가 없는 것이다.
여행과 이주를 보는 우리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여행은 단순한 레저가 아니며, 이주는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개인에게는 확장된 자아, 개방적 자아를 심어주는 일이고, 사회에게는 미래를 위한 장기투자다. 무엇보다 삶의 품격을 세우는 일이다.
터전을 바꾸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나만의 편안함이 짙어지기 때문에 더욱 어려울 것이다. 나의 가족, 동네, 친구들에 둘러싸여 반복되는 편안함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새로운 공기를 언짢아하는 사람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원하는 삶이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당연히 따라야겠지만 그게 아닌데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변화를 미루는 것은 내가 놓친 모든 것들이 아쉬워져 결국 나에게 미안해질 수 있다.
무조건 여행과 이주만이 나의 정신적 경험적 삶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독창성과 복잡성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어렵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지금까지 해오지 않았던 일들을 벌리는 일, 관심사를 돌려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무척 피곤하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이전으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하지만 새롭고 낯선 환경을 의도적으로 접하려는 노력의 대가는 달콤하다.
이주를 결심했을 때 나는 벼랑 끝에 서있었다. 사회가 정해준 길을 위태롭게 걸어가다가 낙오자가 되었다. 건강한 곳이 하나 없었고 살아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때 나는 거주지를 바꿀 결심을 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내 의지로 내가 정한 인생을 다시 쓰고 싶었다. 해외생활 4년 차인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결정은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보다는 인생을 위한 필수코스였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아직도 남겨둔 모든 것들이 아깝지 않았냐고, 결정에 후회는 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무척 아까웠다. 결정에 후회도 많이 됐다. 하지만 그릇이 작은 나는 먼저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비우고 더 알차게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더 다양한 색으로 넘실거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