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수, 나의 운명
멜입니다.
주말만 되면 내리는 비에 조금 속상하지만 고맙게도 땅을 적시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는 적당히 싱그러운 냄새가 날 정도로 내린 뒤 컨디션 좋은 해를 다시 보내줍니다. 이번 주는 일 생각 없이 운동을 즐기고 펜트하우스를 기다리며 보내고 있습니다. 일 생각이 없으니 문득 저의 사수가 떠오릅니다.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연구 대상인 그녀. 글에서도 가끔 언급했지만 저의 사수는 제가 첫 부사수입니다. 그것도 한국인이랑 한 팀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제가 본 그 누구보다 진정으로 팀을 위하고, 저를 위해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일한다면 앞으로의 5년도 나쁘지 않겠다고 환상 아닌 환상을 심어주는 사람입니다.
저도 사수인 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명의 사수였지요. 스타트업 특성상 준비 없이 맡아버린 직책과 부담에 잠 못 이루던 나날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쿨하고 멋진 보스라고 자부했지만 지금 저의 사수를 보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거든요. 자기만 한 보스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꼰대일 확률이 높은 걸까요? 적어도 저는 젊은 꼰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사수를 보면,
1. 지도는 명확히
업무 지시는 명확하고 일관됩니다. 이 업무가 필요한 이유부터 설명을 해주면서 제가 어떤 가치를 더할 수 있는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무조건 떠넘기지 않습니다. 제 업무 범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그것도 일을 다 넘기지 않고 무조건 나눠서 하는 편이에요. 제 시간이 귀하듯, 남 시간도 귀한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향상이 필요한 부분은 정식으로 제기하며 감정을 제외하고 말을 해줍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정리했을지 알기 때문에 저도 더욱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2. 책임은 확실히
세일즈 특성상 거의 모든 부서와 소통하게 되는데, 그러는 도중에 크고 작은 이슈들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서 위치를 사용하여 중재를 해주는 것,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요구하고 소리를 높이는 것 모두 사수의 담당입니다. 저를 위해, 팀을 위해 맞서 싸워주면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 모두 그녀입니다. 팀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필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3. 공치사는 정확히
내가 해놓고 공을 가로채는 상사는 최악이죠. 저의 그녀는 공치사를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저번 달에는 운이 좋게 2월의 세일즈로 뽑혀서 디렉터가 회사 전체에 축하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어요. 제 사수는 그 메일에 덮어서 제가 얼마나 열심히 했고 기여해왔는지를 적어주면서 팬트리에 맛있는 도넛을 쌓아서 축하해주었지요. 이러면 누가 일을 덜하고 싶겠어요?
4. 너의 의견을 소중히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스피커폰으로 사수와 자주 통화를 했는데 엿듣던 엄마가 그러셨어요. 내용만 들으면 누가 사수인지 모르겠다고요. 제 사수는 저를 전적으로 믿고 존중해줍니다. 큰 결정을 할 때에도 무조건 저의 의견을 물어보곤 하죠. 그것이 저와 상관없는 팀의 일이라도 확신이 없는 것들은 저에게 묻곤 합니다. 답정너일 때도 있지만 그만큼 제 의견을 소중히 한다는 느낌은 언제나 최고입니다. 그리고 저보다 8살 가까이 많지만 한 번도 저에게 반 말을 쓴 적은 없어요. 항상 -님을 붙여가며 존대해주는 나의 사수.
이런 부분들이 왜 그렇게 부각되어 보였을까요? 바로 제가 그런 보스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제가 노력했던 부분들은 맞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바쁜데, 왜 너네는 못 알아주냐고 혼자 푸념하고 억울해한 적도 있어요. 참 많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저의 부사수에게는 저의 사수에게 받은 그대로 돌려주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써먹는 느낌이 아닌 키우는 느낌으로, 부하직원이 아닌 동료의 위치에서 그녀에게 좋은 사수가 되기 위해 매일 저를 돌아봅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노력하다 보면 제 부사수도 언젠가는 사석에서 저를 좋은 사수라고 말할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