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캐닝 공원 - 페라나칸 음식점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읽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저의 대답도 작가처럼 나무였는데, 심오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천년만년을 살 수 있어서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나무는 묵직하게 물 한 방울까지 온 힘으로 끌어올려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온통 나무만 이야기하는 이 책 덕에 저 또한 눈을 돌려 나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의 나무는 크고 푸르르고 건강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한국의 나무들에게 미안합니다만, 이곳의 나무들은 삶의 의지로 가득 차있습니다. 겨울도 없을뿐더러 비도 자주 오고 사람들이 나무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니 삶을 정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두텁고 튼튼한 밑동을 보면서 한국 나무들이 휴가나 왔다 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싱가포르에서 굳이 유흥가를 찾자면 떠오르는 클락키 (Clarke Quay)는 도심 중의 도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Fort Canning 공원은 그 클락키 옆에 있습니다. 근처에서 일하는지라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행자가 되어서야 서둘러 가봅니다. 무려 토요일 오후 시간을 뺐습니다. 황금시간에 공원이라니, 여행자 치고는 사치를 부린 것입니다.
포트 캐닝 공원은 완벽하게 도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센트럴 파크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약 40만㎢로 작은 언덕 수준이지만 이곳의 땅덩이를 고려한다면 결코 적은 면적은 아닙니다. 국립미술관, 박물관들이 주변에 깔려있어 초록색을 좋아하는 여행객이라면 도심 속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포트 캐닝 공원은 산이 없는 싱가포르에서 정말 믿기지 않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요새의 역할도 하였고, 때문에 아주 귀여운 대포들도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연도별로 잘 정리가 되어있기 때문에 길 따라 걷다 보면 공원이 아니라 싱가포르 역사를 산책한 기분입니다.
역시나 길을 헤매었습니다. 그 유명하다는 동굴 샷도 찍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여행객이었다면 조금 쪽팔릴 뻔했으니 나중에 다시 가보기로 합니다. 길만 안 헤맸다면 1시간 안에 끝낼 수도 있었던 공원 산책이지만 꼬박 2시간이 걸렸습니다. 돌다 보니 Gothic gate가 나왔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한강입니다. 인조 잔디지만 분위기 내기는 충분합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데이트를 하거나 가족모임을 갖습니다. 대부분은 데이트로 보여서 약간 속이 상했습니다.
어둑해졌을 때 드디어 출발했던 위치로 돌아왔습니다. 7시에 예약해둔 True Blue로 갑니다. 201년 미슐랭을 받았고,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방문한 곳이라고 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페라나칸은 화교 문화와 말레이 문화가 합쳐지고 여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의 외래문화가 더해져 나온 독특한 싱가포르 문화로 의식주 모두 특색이 짙기 때문에 눈여겨보고 있었죠. 그 가족에서 태어난 여자는 논야, 남자는 바바라고 칭하지만 지금은 워낙 국제결혼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할 만큼 동질화되어 있어 지금은 이렇게 호칭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근처에는 페라나칸 박물관도 있는데 올해 말에나 문을 다시 연다고 하니 또 와야겠군요. 메뉴는 제가 골랐지만 마침 함께 간 친구가 이쪽 계열입니다. 그녀의 추천대로 시켰더니 역시나 향신료 폭발이더군요. 페라나칸 음식 자체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다 보니 대체로 비싼 편인데, 이 집은 특히 엄격한 레시피에 따라 오랜 시간 공들여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파인애플이 들어간 생선탕 요리와 블랫 넛이 들어간 치킨요리를 시켰습니다. 어묵 비슷한 오따오따도 시켜서 함께 먹었습니다. 다양한 향신료를 썼지만 생선의 잡내를 전부 잡지는 못했고, 블랙 넛의 속을 파서 국물과 함께 떠먹는 맛은 신비로운 동시에 부담스러웠습니다.
분위기가 팔 할이었던 이 식당을 나와 우리는 아르메니안들이 지었다는 교회 앞에서 아르메니아라는 국가가 어디에 있는지 잠깐 찾아본 후, 이제는 어린이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우표 박물관을 지나 예전 성당, 지금은 핫플레이스인 CHIMES까지 걸어갔습니다. 완벽한 데이트 코스여서 둘 다 낙담하긴 했지만 즐거운 밤 산책이라고 자축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데이트 앱을 켜서 열심히 구경했습니다. 여행을 떠난다면 현지인과의 데이트는 필수라고 키득거리며 열심히 구경을 했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서로의 이상형에 대해서만 기똥차게 늘어놓고는 다음 여행을 기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