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Top 5 안에 드는 데이트
멜입니다.
싱가포르는 세미 락다운이어서 식당도, 카페도 모두 테이크아웃만 가능합니다. 거리는 2명만 다닐 수 있으며 집에도 하루에 2명 이상의 게스트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달의 락다운에 이제 마지막 1주만 남겨놓은 이 상태에서도 락다운 바로 직전에 했던 데이트를 잊을 수 없어 이불을 차며 일어나 밤늦게 노트북을 켰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무슨 생각으로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그 장소에 나간 것 자체가 실수였던 만남이었어요. 그와는 로컬 사람들이 위주로 쓰는 데이팅 어플에서 만났습니다. 일 년 넘게 눈팅을 해오다가 조금씩 의심을 풀고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난 세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은 어플에서 바로 전화를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더라고요. 만나기 전에 전화를 하는 것이 낯설었지만 어떻게 보면 서로 시간낭비 안 하고 상대를 파악할 수 있어 어플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고, 특히 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기능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전화에 선뜻 응했고, 그와는 30분 정도 전화를 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케미가 하나도 맞지 않았지만 제일 어이가 없었던 것은 물어보지도 않았던 'K 문화'에 대한 불쾌함 및 거부감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었어요. 쓸데없이 맛에 비해 비싸기 때문에 자기는 한식당을 싫어하고, 사람들이 왜 kpop에 열광하는지 모르겠으며 앞으로도 한국은 가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두서없이 말하는 그에게 할 말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나는 왜 만나려고 하니?'
다행히도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길래 서둘러 끊었습니다. 그렇게 30분 낭비했지만 안 만난 게 어디냐고 생각하며 잊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어요. 읽씹 해도 계속 문자를 보내는 그가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호기심이 생겼어요. 내가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긴가민가하는 마음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도심의 어느 바에서 만났고, 저는 그를 보자마자 집에 가고 싶었어요. 잘 나온 사진만 올리는 것은 알겠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거든요. 정말 유심히 살펴보면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catfish (타인의 사진으로 데이트 신청을 얻는/하는 사기꾼)에 근접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밥 한 번 먹는데 사람이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어요.
안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애피타이저로 먹을 것 같은 피자 하나와 소주, 맥주를 시켰어요. 굳이 뭘 더 먹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홀짝 거리며 수다나 떨어야겠다고 생각한 저는 아마추어였습니다. 저는 그의 인생관과 생활신조, 자신은 여타 현지인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들어야만 했어요. 자기는 이미 콘도를 샀기 때문에 결혼이 급하지 않다느니, 여자복만 없었고 다른 건 다 만족하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빨리 눈 앞의 술을 끝내고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소주 한 잔으로 한 시간을 홀짝 거리는 그를 놔두고 소맥을 말아 들이켰습니다. 소주도 소맥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저 이 술이 끝나면 집에 가리라는 생각으로 급하게 들이켰어요. 그렇게 술을 끝내고 나오는데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이제 각자 갈길을 가야겠다 싶어 라멘이 먹고 싶어 근처 이자카야를 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피자 반 판을 먹고 또 음식이 들어가?"였습니다. 무슨 시카고 피자도 아니고 비스킷같이 얇은 손바닥 피자를 나눠먹었는데 배가 찰리가 있나요? 더구나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니 탄수화물이 엄청 당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너는 집이 코앞이라고 하니 갈길을 가라, 나는 라멘을 먹고 가겠다고 보내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제가 가는 길이 틀렸다면서 갑자기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구글맵을 보고 맞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그 이자카야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어요. 계속 뒤를 졸졸 쫓아오다가 별안간 앞장서 앞으로 돌진하며 따라오라는 그를 보며 저는 속도를 조금씩 늦췄어요. 너무나 황당하고 짜증 나는 상황에 참을 수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막 손님을 내려주고 슬슬 시동을 거는 택시가 보였습니다.
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급할 때면 어김없이 택시가 지나가는 장면들이 많잖아요? 혹여나 그가 쳐다볼까 저는 문워크로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면서 택시 문을 열었고, 일단 몸을 구겨 넣으며 외쳤습니다. "고! 고!!! 저스트 고!" 일단 직진하라는 다급한 저의 외침에 아저씨는 묻지 않고 출발하였습니다.
차 안에서 그의 번호를 차단하고, 집 앞 슈퍼마켓에서 김치라면 한 봉지를 사 집에서 맛있게 끓여먹었습니다. 고춧가루 팍팍 풀어 국물까지 다 마셨어요. 그제야 좀 살 것 같더라고요. 뒤늦게 취기가 올라왔습니다. 슬프고 분하고 짜증 나는 감정도 같이 올라왔어요. 그날 밤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에 그 데이트가 마지막 데이트였어요. 정부는 다음날 별안간 락다운 발표를 하였고 저는 어렵게 시작한 '사람 찾기 프로젝트'를 멈춰야만 했습니다. 3주가 지난 지금도 간간히 생각나는 그와의 데이트가 최악의 데이트 Top 5에 랭킹 되었습니다.
소개팅으로 만나도 이상한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하물며 어플은 오죽하겠나요. 거의 까나리액젓 수준의 복불복임에 틀림없는 어플, 도대체 사람은 어떻게 걸러야 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