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성, 그리고 둔감성이 주는 경각심
멜입니다.
저는 오디오 채널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의 애청자입니다. 잠이 안 올 때 들으면 좋겠다고 오디오 클립 어플을 다운로드하였는데, 우연히 이 채널을 발견하게 되었고, 전 화를 순식간에 정주행 해버렸습니다. 범죄영화를 프로파일링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격장애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범죄사건에 대해서도 깊이 파고들기 때문에 프로파일러가 한 때 꿈이었던 저에게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고마운 채널입니다. 책으로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1위이지요.
아마 최신화였던 것 같습니다. 이다혜 기자님이 민감성을 죽이고 둔감성을 높이는 요즘 사회에 대해 걱정을 표하며 말했던 '나는 나의 민감성을 죽이지 않겠습니다'라는 어구가 찌릿하게 마음속을 파고들었어요. 삶의 압박에 취해 잊고 살았던 나의 민감성. 누구 못지않게 민감한 저인데 말이죠. 민감성은 보통 부정적인 어구에 많이 사용되는 것 같아요.
가령, "저는 소리에 너무 민감해서 잠을 깊게 못 자요."
혹은, "저는 민감성 피부여서 트러블이 자주 나요."
보통은 이런 맥락처럼 말이죠. 두산백과에서는 민감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극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서 흥분하기 쉬운 상태 또는 성질.
맞는 말이죠. 외부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니 민감성 피부가 되어 울긋불긋하게 되는 것이고, 소리 자극에 민감하다 보니 남들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잠을 쉽사리 이루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리적 자극 말고 사회의 자극은 어떨까요?
사회의 부조리, 안타까운 사건들,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입장 표명 등 나를 둘러싼 주변 현실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살고 있는 저이기에 마음이 따끔했습니다. 한국에서 멀어진 지 4년, 이제는 사회적 이슈들을 말하는 친구들의 카톡방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예요. 그렇다고 싱가포르의 뉴스에 민감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코로나 확진자 추이, 언제 다시 식당 문을 열 것인지, 그리고 언제 국경이 열려 한국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지 정도입니다.
머리 위에서 바르르 떨리던 안테나는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까요? 현실에 안주해버린 소시민의 전형적인 표본이 되어가기 때문일까요? 불편한 진실에 같이 불편하고 싶은데, 이제는 너무나 둔감해져 버린 나 자신이 보입니다. 눈을 닫고 귀를 막으면 사는 것이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매사에 냉정해지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나잇값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가 원한 제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 기억납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원치 않은 회식 및 노래방에 끌려가야 하는 것, 상사의 입맛에 따라 원치 않은 메뉴로 배를 채워야 하는 것, 아슬아슬한 성희롱을 견뎌야 했던 것 등에 민감했어요. '다들 그렇게 사니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라는 조언을 가장 싫어했던 저는 매사에 민감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한정된 민감성이었어요. 내 삶도 일단 살고 보는데, 남의 이야기는 나중에 정말 어른이 된 후에 공감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또 날을 잡았습니다. 관심이 있었던 분야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무뎌진 칼날을 갈아 펜으로 만들 준비를 해봅니다. 흔적을 찾기 힘든 안테나로 머리를 다시 단장하고 나의 삶을 떠나가 타인의 삶에 대해 느껴봅니다.
삶의 다양한 자극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서 흥분하고, 토로하고 나아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수정 박사님과 같은 어른이 되도록 나를 다잡아보는 토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