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은 쿨할 줄 알았습니다.
멜입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업무 풍년에 정신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뽑은 팀원 이야기도 하고 싶고, 면접 썰도 남기고 싶지만 심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브런치를 조금 멀리했어요. 그러던 중에 우리 팀 유일한 서양인인 동료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멜, 오프라인으로 잠깐 통화할 수 있니? 근무시간 끝나고 바로 연락해도 될까?"
심상치 않았습니다. 보통 동료가 이렇게 은밀하게 접근하는 경우는
1. 이직한다고 친한 동료에게 먼저 통보할 때
2. 퇴근 후 같이 놀자고 제안할 때
정도로 나뉠 수 있는데 전제가 ‘친한 동료’, 혹은 ‘친해지고 싶은 동료’이기 때문에 평소에 연락도 하지 않던 동료가 연락을 하니 뜨악했습니다. 뭘까요? 장난스럽게 티저라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 말이 없더라고요. 싸한 분위기.
6시가 땡땡 치니 왓츠앱으로 바로 연락이 왔어요. 정말 장문의 문자가 몇 통이 연달아 오는 걸 보니 메모장에 문자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나 봐요. 내용을 보니 왜 이렇게 은밀하게 접촉을 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조금 귀엽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싱가포르 지사의 유일한 백인이에요. 두 세명 정도는 항상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 잘리거나 다른 지사로 발령이 나고 지금은 1년 전에 입사한 이 친구 한 명뿐입니다. 동아시아 시장을 담당하는 백인은 사실 흔치 않은 모양새지만 뽑은 사람 마음대로 아니겠어요? 우리 팀 재롱둥이인 이 친구는 자주 나대고 가끔은 귀여운 팀의 막내입니다.
저와 같이 account manager를 담당하고 있지만 담당 시장이 달라서 평소에 교류가 거의 없었던 친구인데 오죽 답답했으면 저에게 연락을 했을까 싶더라고요. 이전 동료들이 그랬듯이 그 또한 팀장의 마이크로 매니징에 말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실적은 나쁘지 않지만 최근에 본의 아니게 실수를 연달아해서 팀장의 관심이 모두 집중되어 있나 봅니다. 계속된 꾸지람에 익숙하지 않은 이 친구는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고, 저에게 SOS를 요청했던 거예요.
저는 서양인들, 특히 백인들에게 아주 심각하게 높은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예전 회사의 백인 동료들, 오가다 만난 백인 친구들 모두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거든요. 모두 홍콩에서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뚜렷한 이유 없이 자신을 아주 후하게 평가하고, 입만 살아서 일 처리를 똑바르게 하지 못하며 회사를 떠나는 것에 그리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람마다 다름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이 편견을 깨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터라 그러려니 하고 있었죠.
그래서 이 친구의 고민상담 요청은 정말 뜻밖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 실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너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지를 자세하게 물어보는 그를 보며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냥 전화로 물어볼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문자로 정중하게 물어보는 그에게 제가 먼저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단번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물론 그의 실수는 꽤 심각했지만 팀장의 실수도 부분적으로 있었고 빨리 보고한다면 충분히 같이 극복할 수 있는 문제 같았습니다. 자기는 영혼을 갈아 넣으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자꾸 이런 일이 있어서 너무 속상하다면서 울먹거리더라고요. 이 일로 잘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잘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그를 보며 저는 저의 편견을 깼습니다.
'백인도 이렇게나 직장에 진심일 수 있구나'
'백인도 고용 안정성으로 이렇게나 두려움을 느끼는구나'
속으로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래, 백인이라고 다 같은 사람들이 아닌데 나는 너무나 편견 속에 갇혀 지낸 것 같았어요. 고용 안정성이 제로인 이 나라 앞에서는 인종도 국적도 다 중요하지 않은, 그냥 똑같은 외노자일 뿐임을 알았어요. 동지애가 샘솟았습니다.
꽤 심각하고 급한 문제같아 보여서 몇 가지 팁을 주고는 바로 팀장에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메신저로라도 먼저 말을 해놔야 내일 일찍 같이 수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는 다음날 잘 해결되었음을 알리고자 저에게 또 장문의 감사 메일을 보냈습니다. 또다시 감동했지요.
일에 대한 태도도 훌륭하고 예의도 바른 이 백인은 저의 편견을 깨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마 팀장도 이런 면모를 보고 동남아시아 담당으로 이 친구를 고용한 것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잘 해결된 것 같아 뿌듯하였고 저에게 상담 요청을 한 것도 감사했지만 가장 감사했던 것은 백인에 대한 저의 잘못된 편견을 없애준 것이었어요. 조만간 이 친구와 맥주 한 잔 하면서 별 거 없지만 고달픈 삶을 나누어야겠어요.
치얼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