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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가혜 Nov 11. 2018

크로아티아에서 수능시험 보는 꿈을 꿨다

나의 크로아티아 여행기 7

"선생님, 죄송해요. 저 망한 것 같아요"


여행 중에 수능을 다시 보는 꿈을 꿨다. 가상으로나마 10주년 기념 재응시인가. 정확하게 그날 5시 이후로 공부에서 손을 놨으니 시험을 잘 봤을 리 만무했고, 뜬금없는 개꿈으로 타국에서 아침을 맞으려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런 근본 없는 꿈의 근본은 어디인가.


꿈이 생생해 기분이 다 울적해졌다. 남편에게 침을 튀겨가며 꿈 이야기를 했다.

"글쎄, 우리 사장님이, 그 뭐지?? 수능 출제하는 사람 중에 대빵 있잖아, 한국교육정보평가원장. 그거였어. 그래서 수능이 끝나자마자 TV에 나와서 '에, 이번 수능은요~' 시험문제 총평을 하더라니깐. 근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우리 담임 선생님이 옆팀 팀장님이었어. 나 원 참,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러게. 자기가 여기까지 와서도 회사일에 메어있다는 뜻 아닐까. 내가 보기에 포인트는 수능 재응시가 아니라 사장님과 팀장님의 출연인 것 같은데?"


벌써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행이 벌써 끝을 보이고 있었다. 남편의 말처럼 이 꿈은, 환상적이었던 휴가의 끝을 알리는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어릴 적에 나는 유난히 외할머니댁 놀러 가기를 좋아했더란다. 외할머니와 이모, 외삼촌-외숙모가 모두 한 동네에 살고 있어서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사촌언니, 동생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모님은 그때 '네가 집에 돌아오려 할 때마다 싫다고 울고불고 떼를 써서 외할머니댁에 가는 게 무서울 정도'라고 표현하셨다.


한 번은 부모님이 "가혜 네가 그렇게 가기 싫음 여기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아볼 테야? 여기서 살면 매일 할머니 할아버지 진지도 준비하고 청소도 해야 해. 알겠지?” 단순히 경고성 발언이 아닌, 진심으로 ‘널 두고 떠날 테니 잘 지내야 한다’의 말씀을 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쯤 되면 날 구독하는 구독자님들께선 내가 조부모님 대신해야 하는 잡무에 대한 두려움으로 놀랄만한 평범한 계집애가 아니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테다.


일단은 나의 여행지를 파괴하기 싫었다. 집, 마을, 집 앞 슈퍼... 거주지가 주는 일상성이 있다. 내 성격, 상황과 관계없이 느끼게 되는 일상의 편안함, 익숙함, 안정감, 무료함, 권태로움, 고단함 등. 여행지에서 느끼는 긴장감, 두려움, 설렘, 흥분과 정반대의 것들이다. 물론 할머니 댁이 낯설어서 두렵고 긴장되는 여행지라고 보긴 어렵지만, 10세 인생에선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하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여행지로 더없이 완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여행의 설렘도 지루하고 고단한 일상이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들이 될 것이다. 늘 긴장되고 짜릿하고 흥분되는 것들로만 일상을 채운다면 신경과민 또는 심장마비로 오십 전에 죽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설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일상이 채우게 될 것이다. 만약 더 크고 새로운 자극에 대한 지속적인 욕구가 생긴다면 그 사람은 여행가 또는 탐험가를 하지 않고는 베겨날 수 없는 성격일 거다. 명백하게 나는 탐험가 스타일은 아니다. 일상성과 일탈성이 적절한 텐션을 유지해야지만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고 양면으로부터 오는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다.


여행이 이제 곧 끝난다는 생각에 한없이 우울해지고, 집중할 수 없을 때는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크로아티아로 이주해서 일상을 꾸리는 상상을 해봤다. 눈을 뜨면 직장에 가고 일을 마치면 마트에 들러 장을 본다. 여긴 한국이 아니니깐 장을 보지 못 한 날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건 불가능하겠지. 매일 마트에 들러 늘 비슷한 식재료를 사고 매일 비슷한 저녁을 먹는다. 아, 벌써 지루하다. 내가 상상한 크로아티아에 이런 장면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인들 냄비에 물을 올려 라면을 끓이고, 다 먹은 찌꺼기는 물기를 제거하고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비우고, 세제를 짜내어 꿉꿉하고 냄새나는 싱크대에서 세척한 뒤 건조대 위에 그릇을 엎어 말리는 과정이 모두 즐거워지진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덤덤하게, 무리 없이 해내기엔 차라리 익숙한 우리 집 부엌이 낫다.


혹자는 말한다. 여행은 우리가 사는 세계로부터 우리를 분리하고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기회라고. 이것을 낯섬과 익숙함의 문제로 보면 ‘분리, 객관화’로 대별되는 낯섬이 결국엔 돌아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만드는 - ‘익숙함’을 위한 것으로 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여행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여행의 뒤에 이어질 익숙하고도 새로운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이런 문구가 초등학생용 모닝글로리 노트에 쓰여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이라는 건 돌아갈 곳이 있기에 즐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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