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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청춘 Dec 28. 2015

남과 여

Pisano & Ruff - The Drifter 

오늘도 날이 흐리다. 공기는 습하고 차다. 그래도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다. 파도가 거세지 않아 해변을 걷기 편하다. 매일 보는 해변임에도 루이는 여전히 새로운지 들떠 목줄을 놓아달라고 보챈다. 슬그머니 손에 힘을 빼자 루이가 백사장을 이리 저리 뛴다. 


해변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쓸쓸한 겨울 해변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은 그네들이 오지 않아 해변이 쓸쓸해진 것임을 모른 채. 나는 사람 없는 해변이 좋다. 해변과 파도, 바다가 나만을 위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내가 바다에 나온 것은 작은 병 하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7일 전 이별을 고한 그녀가 미워 배를 빌려 바다에 나갔었다. 그날도 하늘은 흐렸다. 바다 한 가운데서 나는 그녀의 불행을 바라는 저주의 글을 휘갈겼다. 그리고 플라스틱 병에 넣어 바다에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후회가 밀려왔다. 병에 담겨 버려진 것은 그녀의 불행을 바라는 내 원망이 아니라 그녀와 아름다웠던 내 추억임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했던 3년 6개월 9일의 시간을 모두 바다에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스틱 병을 기다리며 매일 이 해변을 나오는 것이다. 루이와 함께. 


플라스틱 병이 이 곳으로 떠내려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매일 내가 해변에 나오지만 종일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병을 발견할 확률은 매우 낮다. 이미 수거되어 쓰레기처리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 그 병을 내가 수거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해변에 나온다. 오늘처럼 흐린 날에도.


루이와 파도를 피하며 한 십 분을 걸었을까? 한 여인이 두 아이와 함께 해변을 걷는 것이 보인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에 보이는 미소가 희미한 것으로 보아 마음 속에 근심 하나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어떤 근심일까? 그런데 아이들을 보니 남매인 줄 알았는데 남자아이가 그녀를 닮지 않았다. 누구의 아이일까? 그 때 멀리서 재규어 한대가 빠르게 달려와 해변에 멈춘다. 남자가 내린다. 남자 아이가 아빠라 부른다. 아하 저 남자의 아이였군.


그때 아이보다 여자가 먼저 달려가 남자에게 안긴다. 남자는 여자를 안고 빙그르 한 바퀴 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이렇게 직접 보다니! 그러니까 한번 상처를 겪은 사람들이 다시 사랑을 시작한 모양이구나. 서로 어떤 이유로 첫 결혼에 실패를 했는지 모르지만 부디 저 감정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행복하기를 바란다. 더 이상의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지 말고 그냥 여기서 좋게 마무리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처럼 미련을 이기지 못하고 이 해변을 서성이지 않기를 바란다. 


루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쉬지 않고 해변을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루이가 남긴 발자국을 파도가 지운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P.S. 피아노 앤 러프의 1970년도 앨범 <Under The Blanket>에 수록된 “The Difter”를 듣다가 철지난 해변이 떠올랐다. 해변을 산택하며 듣기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영화 <남과 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그 장면에 나오던 개와 그 주인. 그 개와 주인은 배우가 아니라 촬영 중에 우연히 잡힌 지역 주민이라고 한다. 그 주인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다. 어설프게.


피아노 앤 러프는 기타 연주자 존 피사노와 프렌치 혼 연주자 윌리 러프 듀오이다. 1970년 앨범에서는 버트 바카락이나 허브 앨퍼트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The Drifter”는 2년 전인 1968년 선샤인 팝 밴드 하퍼 비자르가 노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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