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속 '내 사람'과 '외부인'
[일상] 코로나19가 바꾼 한국 사회의 모습
지난 3월,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는 알림 문자가 하루에 네댓 번씩 오던 때였다. 운이 좋게도 새로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출근 첫날, 팀장은 흰 마스크를 쓰고 나를 맞이했다. 나도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서로의 얼굴과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업무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서 자리가 가 앉았다. 조금 뒤 여전히 흰 마스크를 쓴 팀장이 찾아와 당부할 사항이 두 개 있다고 했다. 첫째, 회사 내에서 돌아다니지 말 것. 화장실도 최소한으로 다녀올 것. 둘째, 항상 마스크를 끼고 일할 것. 말을 마치고 돌아선 팀장은 마스크를 훌렁 벗었다. 그러곤 팀을 찾아온 부장과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부장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 팀장에게 나는 언제 병을 옮길지 모를, 믿을 수 없는 ‘외부인’이었고 부장은 예의를 갖춘다는 핑계로 얼굴을 보여도 되는 ‘팀장의 사람’이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조심해야 하는 시기인 만큼 팀장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서운했다. 첫날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지하철 안, 누군가 기침을 서너 번 하더니 재채기를 했다. 자동으로 눈길이 갔다.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있던 여성은 50대쯤 되어 보였다. 그는 재채기를 하고 나서야 턱에 걸친 마스크를 허둥지둥 올려 썼다. 속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감염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데 마스크도 제대로 쓰지 않고 있었다니. 짜증이 난 건 나만이 아닌 듯했다. 곳곳에서 “아이…”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인상을 쓰며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주머니는 사람들의 시선과 짜증을 느꼈는지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코로나19가 퍼지고 있는 때이니 마스크 없이 재채기를 하면 당연히 짜증 나지. 특히 남인데. 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곳에 다녀오는 중인지도 모르는데…” 속으로 아주머니의 울상을 외면하곤 나의 짜증을 합리화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에 만난 팀장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처음 본 아주머니의 기침 한 두 번엔 짜증이 났지만, 나도 ‘내 사람’들에겐 기침 몇 번 한다고 짜증 낸 적이 거의 없었다. 가족, 친한 친구들과 만날 때는 카페나 음식점에 들어가면 곧바로 마스크를 벗고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 상대가 마스크 없이 재채기를 하거나 잔기침을 한다고 해도 짜증이 치솟지 않았다. 오히려 “너 코로나 아니냐” 하며 장난을 쳤다. 친구의 성 씨를 붙여 ‘0로나’라고 부르는 등 우스갯소리를 하고 넘기곤 했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내 사람들에겐 지나치게 관대했다. 팀장이 외부인인 내 앞에선 마스크를 벗지 않고 부장 앞에선 벗은 것과 똑같았다. 외부인을 볼 땐 뛰어오느라 숨이 차서 나오는 기침이거나 감기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보단 감염병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 사람’을 볼 땐 그도 감염병을 옮길 수 있지만 ‘에이 코로나는 아닐 거야’하는 막연한 믿음부터 생겼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에는 ‘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경계선이 명확해지고 있다. 한 언론사에선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나라 구성원들 간 신뢰도가 높아졌다는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뢰의 범위가 좁아졌고 그 범위 밖의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고도 진단했다. ‘내 사람’ 범주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믿지만, 외부인은 더욱 배척하게 됐다는 얘기다.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일수록 그들을 향한 배척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한국인보다 외국인에게, 그냥 외국인 관광객보다 외국인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그보다 이민자와 난민들에게 더욱 두터운 경계선을 긋게 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자기 자신과 내 사람들에게도 해가 된다. ‘나’ 또한 다른 곳에서는 외부인이 되기 때문이다. 외부인은 당연히 외면해도 된다는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동양인 혐오와 같은 인종차별 문제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내 사람만 신뢰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코로나19 장기화 시대, 팀장과 내가 그랬듯 '내 사람'과 '외부인'의 경계선을 그은 채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