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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글 Oct 19. 2022

신고식 2

외국에서는 한국인을 제일 조심하라던데?

© 최동글

집 근처 역에 내리자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동네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를 휴대폰 조명 하나에 의지해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캐리어 바퀴가 부서지는 바람에 두꺼운 플라스틱이 거친 아스팔트에 갈리며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소리는 온 동네 현관문을 두드릴 기세로 크게 울렸고 나는 벨튀하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이 될 장소로 향하는 내내 어쩐지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시선도 나를 향하지 않았지만 모든 시선이 느껴졌다. 캐리어가 튕겨내는 돌멩이에 종아리를 얻어맞으며 울 것 같은 마음을 다잡았다.


겨우 집에 도착해 자물통에 열쇠를 꽂은 순간, 사람이 기가 차면 욕보다 웃음이 먼저 난다는 관용 표현을 몸소 이해하게 되었다. 열쇠는 헛돌았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일본 열쇠는 사용 방법이 다른가 해서 유튜브에서 문 여는 영상도 찾아보고, 옆집 세입자의 손을 빌려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없다던 열쇠가 갑자기 생겨났을 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나는 K 씨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그는 본사 AS센터에 연락해 자물통 자체를 바꾸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본인 인증을 위해 핸드폰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길래 한국 번호로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떨떠름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당연히 안 되죠.”


나는 일단 AS센터 기사 분을 보내 달라 부탁했고, 삼십 분 뒤 도착한 기사 분에게 재류 카드, 여권과 비자, 계약서를 보여주며 내가 아직 본인 인증 수단은 없지만 이 집에 들어가 마땅한 사람임을 악에 받쳐 설명했다. 그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임차인의 설명은 듣지도 않고 애먼 휴대폰만 붙들고 있는 모습이 요코하마 지점 직원들과 겹쳐 보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따로 없었다. 서러움이 단번에 치밀어 올랐다. 그들은 모두 ‘하이’, ‘하이’ 잘만 대답하면서도 내게 조용히 할 것을 강요했다. 기사 분은 K 씨와 통화를 마친 뒤에도 여러 차례 전화를 걸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자물통을 갈아줬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힘을 덜 들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이 분명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때 나는 그럴 만한 이성도 겨를도 없었다. 일련의 과정이 마치 압박 면접처럼 느껴졌고, 여기서 물러선다면 일 년 내내 주눅 든 채로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30 Kgs이 훌쩍 넘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그만큼 내게는 201호가 물러설 수 없는 승부처인 셈이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고 나는 현관에 누워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았다. 어쨌든 당시 나를 살린 사람은 K 씨기에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묻지 않기로 했다. 사기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감지덕지했다. 내 집 마련이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던가. 태어날 때부터 집은 항상 그곳에 있어 미처 알지 못했다. 단칸방 하나 빌리는 일도 이토록 성가시고 고단하다는 것을. 손가락 마디마다 든 멍을 살피며, 그런 거 몰랐던 때가 더 좋았다고, 작게 웅얼거렸다.


다음 날 몸이 무겁더니 열이 끓기 시작했다. 이불 대신 후드 티를 덮고 딱딱한 바닥 위에 누워 꼬박 이틀을 앓았다. 그 사이 벚꽃은 멋대로 져버렸고 한국에서부터 고대하던 세븐일레븐 봄 한정 말차 슈크림은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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