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멜트 Mar 28. 2023

<더 웨일>리뷰 : 고래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영화를 보며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이다.

그것이 이야기던, 시각적 쾌감이던, 플롯이던, 감정이던 말이다. 

삶의 변화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경험'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자기 개발서나 전문서적보다 소설, 영화 같은 창작물을 더 좋아한다.


영화 '더 웨일'은 한 남자의 삶에 깊이 몰두되는 경험을 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찰리'는 초고도비만의 게이이다. 

첫 장면부터 게이 포르노를 보고 자위를 하다 발작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비추고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그와 그의 지저분한 방이 4:3 화면비의 스크린에 꽉 채워 보여준다.

초반에 불쾌할 만큼 거리를 좁힌 탓인지, 어느 순간 찰리의 그런 모습들이 익숙해지고 그의 좋은 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사려 깊고, 솔직하고, 긍정적이며, 타인의 좋은 면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영화는 그런 그를 지독하리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하루하루 천천히 보여준다.


'엘리'는 '찰리'의 딸로, 그가 게이 연인 때문에 가족들을 떠난 뒤 8년 만에 연락을 받아 그의 집에 찾아온다.

그녀는 어머니조차 끔찍하고 사악하고 말할 정도로 엇나가있고 그것이 떠난 아버지 때문이라 말한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상처 주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그녀가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찰리는 이를 알아채고 어떤 생각이던 진솔하게 적어보라고 말한다.



영화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선명해지는 몇몇 상황과 대사가 있는데, 

찰리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읽는 에세이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것은 엘리가 남긴 것으로, 노인과 바다의 감상문이다.

그 에세이에서 그녀는 헤밍웨이가 고래로 비유한 삶의 고통에 대한 생각들을 말한다.


'고래를 죽이면 어떻게든 삶이 변하리라 믿지만 그렇지 않다. 

고래는 악한 것이 아니고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존재이다.'


이런 생각은 아버지인 찰리에게 큰 영향을 받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찰리가 떠난 뒤 그녀는 이 에세이를 잊고 살았고, 엇나가게 된다.

찰리는 연인의 죽음 이후에도 이 에세이를 간직했고, 

그래서인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선교사가 찾아와도 친절히 대한다.

(심지어 최후반에 그가 선을 넘었음에도 본인은 선을 넘지 않고 화낸 것에 대해 사과까지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야 조금 드러나는 그 에세이의 마지막은 아마도 

소중한 가족들에 대한 엘리의 감사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찰리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이 에세이를 읽고 (혹은 읽어달라고 하고)

마지막에 엘리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은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메타포로 보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

어떤 고통과 고난을 겪고도 견뎌낼 수 있던 것은 그 믿음 덕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말이다.


제목인 '고래'는 주인공의 외형, 단점, 안 좋은 일들로 보인다.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닌 그런 문제를 안고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으로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난 이것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문제'라고 여길 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걸 모두 해결해도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 문제야 말로 삶의 본질이고 행복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화는 훌륭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또 그것을 위해 영상언어는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시퀀스 내내 눈물이 났다.

논리적이지도 거창한 이야기도 필요 없었다.

그저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래에, 우리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